몇 년 전에 교토 대학에서 공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교토 대학에는 종교 철학과라는 이름으로 철학과가 존재한다. 교토대의 종교 철학과는 이른바 교토 학파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20세기 초에 서양 철학과 일본 사상을 종합하여 사유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학문이 몇 대를 걸쳐 이어지면서 교토 학파가 탄생했다. 교토 학파의 철학은 일본의 독특한 철학으로 알려져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연구하는 것 같다. 서양 학자들도 교토 학파의 사상을 번역해 소개하고, 서구의 유학생들이 교토 대학에 와서 공부하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 사상의 전문가이면서 교토 학파의 학통을 잇고 있는 교토 대학 종교 철학과의 수기무라 교수와 교류하는 중에 몇 번 교토 대학에서 공개 강연을 했다. 한 번은 <Impossible possibility. Niebuhr, Kant, Heidegger>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기독교 윤리학자이자 20세기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준 라인홀드 니버는 사랑의 실현을 가리켜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했다. 정치와 사회 윤리 차원에서 사랑은 불가능한 계명이지만 정의의 내용이 발전하면서 점차 사랑의 이상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접근 이론(approximation theory)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불가능한 가능성이란 말을 직접 쓰지 않았다. 다만 양심의 명령에 기쁘게 순응하는 신성한 의지를 성취하는 일이 세상에서 실현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의무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칸트는 말했다. “해야한다면 할 수 있다”는 유명한 칸트의 명제가 그 점을 말해준다. 그 가능성을 내다보고 희망 속에서 인간 이념의 구현을 향해 전진해 나간다. 그 점에서 칸트는 개인의 도덕적 자기 완성을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본 셈이다. 물론 칸트에게서 개인의 도덕적 완성은 사회가 성화되는 문제와도 연결되니, 곧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목적의 왕국도 칸트에게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는 일이 불가능한 가능성이 된다.
하이데거는 무성(Nichtigkeit)의 실현 곧 나(Ich)가 사라지고 나의 ‘존재'(Sein)만 남는 자기(Selbst)의 실현을 가리켜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보았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나’를 비울 수 없고 죽어야만 ‘나’는 사라진다. 그 점에서 무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존재의 부름’이 내 위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한 무아의 자유는 언제나 가능한 명제로 남아 있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런데 강연이 끝나자 질문들이 쏟아졌다. 교토 대학의 공개 강연에는 일반 시민들도 초청 대상에 포함된다. 강연에 오는 시민들은 전공자가 아니지만 생업 중에 틈틈이 자기 관심사에 대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아마추어 학자들이다. 은퇴 후에는 공부를 심화해서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언젠가 고베 시의 유서 깊은 <청년회관>에서 한국 기독교의 특징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는데, 멀리서 기차 타고 참석한 나이 지긋한 분들이 있었다. 강연을 들으려면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강연 후에 식사 자리에서 그 중 한 분이 동학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회사 사장이었는데 은퇴 후에 송기숙 선생의 작품을 번역해서 출판했다. 대하소설 <녹두장군>을 청년용으로 줄여 쓴 책이다. 그 분은 나보다 동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교토 대학의 그날 강연회에 참석한 시민들도 매우 진지한 얼굴이었고, 내 강연에 대해 질문했다. 다만 질문이 세분화되지 않아서 나는 발표문을 전체적으로 다시 반복하며 대답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학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참석한 학자들은 교수들도 있었고,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진 학자들도 많았고, 교토 대학에 유학 온 서양 학자들도 있었고, 교토 대학에서 박사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되었다. 학자들 서너 명이 내 강연 내용에 관해 질문을 했는데, 답을 하다보니 질문들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현장에서는 질문에 답하느라고 바빴는데, 숙소에 돌아와 나는 그들이 왜 거의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 질문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다. “칸트와 하이데거가 ‘불가능한 가능성’을 말했지만 결국 가능성에 치우친 것 아닌가?” 그들의 질문에는 서양 사상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었다. 칸트 같은 계몽주의자는 물론이고 계몽주의와 인문주의적 주체에서 벗어나려고 한 하이데거마저도 결국은 인간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놀랍게도 그날 질문들은 100년 전부터 내려온 교토 학파의 질문이었다.
사실 나는 교토 학파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해 보지 않았다. 다만, 나의 공부 여정에서 만난 ‘불가능한 가능성’을 말한 세 가지 타입의 사유(기독교의 사랑의 윤리학, 칸트의 근대 인문주의 철학,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를 소개하려고 했었다.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말로 서로 다른 길을 제시한 서구 신학과 철학의 차이를 설명하고 인문주의와 하이데거의 차이를 분석한 후에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구원을 위해 각각의 사상들이 주는 의미를 짚어 보려는 것이 나의 의도였다.
그런데 ‘불가능한 가능성’의 문제가 교토 학파의 오래된 주제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그날 발표 주제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백년 이상 축적된 상태에서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질 것이 뻔하고 그들만큼 준비가 안 된 나로서는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일본의 학풍에 대해 몇 가지 특징을 알게 되었다.
첫째, 일본인들은 한 가지 주제를 몇 대에 걸쳐서 연구한다는 점이다. 사실 ‘불가능한 가능성’은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 작은 주제를 쪼개서 파고 또 파며 몇 세대를 걸쳐 연구하고, 젊은 20-30대의 신진학자들까지도 여전히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말하자면 100년 이상 같은 주제를 논의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과학도 아니고 인문학에서 그런 연구방법을 취하다니 참 신기하고 놀랍다. 그러니 교토 학파의 그늘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내게 던진 여러 개의 질문 내용이 결국은 모두 같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처럼 하나의 주제를 몇 대에 걸쳐 연구하면 그 분야에선 세계적 수준에 이를 것이다. 일본에서 노벨상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학자 한 사람이 완성품을 내 놓아 이름을 높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연구하던 것을 뒤로 넘겨 이어지게 하고 다음 세대는 자신의 독특한 문제의식보다는 스승의 물음을 이어받아 연구한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연구는 축적되고 높은 수준의 연구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뛰어난 연구 결과의 공은 어느 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연구 집단과 국가의 이름을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일본인들은 확실히 어느 개인이 두드러지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둘째. 그런데, 그처럼 오랜 세월 작은 주제에 몰두해 연구 업적을 이어가는 일본의 학풍에 좋은 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주제가 너무 세분화된 것이다 보니, 자신들의 연구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잘 모르지 않을까? 한국인들은 너무 거대 담론에 익숙해서 세부적 논리에 약하다면, 일본은 너무 작은 주제에 몰두해 있는 느낌이다. 그들은 자기의 연구 분야에서 세밀한 논리를 세우는데 뛰어나지만, 그것이 다른 분야와 합해져 어떤 큰 그림을 그리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못하고 관심도 없다.
부분은 전체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데, 전체를 모르면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열심히 작은 조각을 완성하는 데만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 작은 조각들을 모아서 전체를 완성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고, 연구자들의 부분적 연구는 전체를 관장하는 세력에 의해 얼마든지 이용당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연구자들은 큰 그림을 그리는 국가 권력에 봉사하며, 국가의 요구에 맞추어 연구하고 있다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연구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
셋째. 칸트나 하이데거가 인간의 가능성에 치우쳐 있다고 하는 그들의 비판 자체도 위험한 측면을 지닌다. 다시 말해 인간의 가능성보다 불가능성만을 강조하는 교토학파의 사상 자체에서 나는 위험한 측면을 발견했다.
교토학파가 하이데거를 연구 주제로 삼은 것도 하이데거가 인간학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은 인간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는 근대를 넘어서려고 한다. 그는 주체를 말하지 않고 주체의 의지도 말하지 않는다. 주체를 해체하고자 했던 60년대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나중에 하이데거를 가져와 포스트 모더니즘을 펼치는 데 이용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글을 보면, 주체, 나, 타자, 영혼, 의지, 마음, 이성, 양심, 선과 악 같은 용어들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존재의 부름을 강조하면서 일종의 무아에서 가지게 되는 자유를 말한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은 종교철학적 성격을 지니고 불교와도 비슷한 점을 지닌다. 교토학파가 하이데거를 가져온 것도 일본의 전통불교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학파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에는 가능성이 강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아마도 하이데거의 ‘기획투사'(Entwurf)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교토학파는 자기들 나름대로 서양과 일본 사상을 종합하면서 서양을 넘어서는 자신들의 사상을 마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이 강조하는 불가능성. 이것은 일본의 정토진종에 기반을 둔 것 같다. 일본 불교는 11세기의 장계도로 유명한 신란의 정토 진종의 영향력이 크다. 교토에 가면 도시 중심에 거대한 규모의 절이 동 서로 나누어져 큰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신란을 조종으로 하는 정토진종의 본원 사찰이다. 원래 하나의 절이었는데 절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우려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둘로 나누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에 사명대사가 조선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교토를 방문했었는데, 그때 사명이 머물렀던 절도 정토진종의 조그마한 사찰이다. 지금도 교토 시내에 남아 있다.
정토진종은 일종의 토착화된 불교인데. 조종인 신란은 타력구원을 강조했다. 불교를 자력구원의종교라고 보는 한국인들의 불교 인식과 사뭇 다르다. 타력구원이 강조되면 인간의 수동성이 중시되면서 주체로서 성장하기 어렵다. 더구나 교토학파가 일본불교의 파트너로 삼은 하이데거는 공공성이나 사회윤리적 차원을 초월해서 탈사회적인 ‘자기'(Self)에 집중한 초개인주의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학파는 하이데거의 탈윤리적 초개인주의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불가능성을 하이데거보다 한층 더 강조한다. 그렇게 되면 대중은 사회 변화의 주역으로 나설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불교가 추구하는 인간 해방의 차원과 일치할지 모르며, 그 점에서 일본의 정토진종은 일본적 불교의 정수를 정립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성이 약화되면 기존의 위계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안정성을 공고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책임자가 사라지게 되고 숙명론이 자리잡게 된다. 2차 대전의 패전국 일본이 침략에 대한 반성을 도외시하는 것도 철학적으로 책임적 주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는 공동체의 액을 막고 복을 구하는 종교이므로 인류 보편 가치를 지향할 책임적 주체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일본 불교는 타력 구원의 가르침을 통해 초개인주의적 불교를 더욱 숙명론의 종교로 만든 것 같다.
물론 기독교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타력 구원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창조 신앙 때문에 인간이 세상의 주인(dominus mundi)임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주체성이 언제나 양립한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자유와 공동체주의적 사랑을 동시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개인이 사회윤리의 책임적 주체임을 늘 강조한다.
중세의 아퀴나스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주체성이 사라지지 않음을 강조한다. 주체는 변화를 겪기 때문에 중세철학은 주체를 실체라는 개념보다 열등하게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퀴나스는 삼위일체의 삼위를 가리켜 세 주체라고 부른다. 일체 곧 하나가 되는 통일성은 삼위 곧 여러 주체들의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칸트와 헤겔이 발전시킨 주체라는 개념은 이미 중세의 <신학대전>에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책임적인 자율적 주체라고 하는 근대적 철학 개념은 기독교 신학의 산물이며,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향한 근대 혁명과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 역시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의 영향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나의 발표를 두고 제기되었던 거의 비슷한 질문들. 그것은 모두 인간의 주체성을 약화시키는 일본 불교의 전통에 기반을 둔 질문으로 보인다.
일본 학풍의 장단점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점은 개인이 두드려지려 하지 않고 대를 이어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 어떤 면에서 그것은 상당히 큰 덕목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에 교토 학파의 철학은 책임적 주체의 성장을 억제하는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하여 안정적 질서를 강조하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기여하는 측면을 지닌다. 교토학파가 2차 대전 때에 일본의 제국주의를 옹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기무라 교수를 비롯한 일본학자들과 이런 문제를 토론할 기회가 곧 있을 것이다.
사진: 교토 시내의 정토진종 본사 경내(2019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