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오는 스가랴는 BC 6세기에 바빌론에서 탄생했다. 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중동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왕 시대에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힘쓴 유대인 예언자가 스가랴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BC 8세기에 앗시리아의 살만에셀과 그의 아들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에, 이스라엘인들을 이역만리 낯선 곳으로 흩어버리고 사마리아에는 다른 나라의 다양한 주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만들었다(열왕기하 17장).

그때에 추방당한 이스라엘 주민들이 정착한 지역 중에 메대라는 곳이 있는데,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이고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에 속한 곳이다. 지금도 이란에는 당시에 유배되었던 유대인들의 후손이 살고 있다. 유대인으로서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던 에스더와 높은 관직을 맡았던 모르두개라는 인물이 구약 성서에 나오는데, 그들의 무덤이 이란에 남아 있어 지금도 참배객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발흥은 이전의 패권국가인 바빌로니아 제국의 멸망을 의미한다.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의 포로로 끌려와 이국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때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 꾼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스가랴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측량 줄을 손에 쥐고 있는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

그런데 그 천사의 말은 이러했다.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에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로 된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스가랴 2:5)

사실 여러 민족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끝까지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매우 가난한 자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갈 때에 왕과 왕족과 귀족들과 기술자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몇 년 후 바빌로니아 제국 수비대 대장이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중요한 건물을 모두 불살랐다. 그리고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만 남겨 놓아 땅을 경작하게 하고 세금을 바치게 했다.

예언자 스가랴가 예루살렘에 사람이 넘치고 가축이 넘치는 환상을 본 것은 예루살렘이 옛 영화를 되찾고 재건됨을 가리킨다.

그러나 스가랴가 본 새 예루살렘에는 성곽이 없다. 성곽이 없다는 것은 전쟁을 모르는 도시라는 뜻이다. 평화의 도시를 의미한다. 새로이 재건될 예루살렘을 보호할 성곽은 돌로 쌓은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 성곽이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떤 권력자도 영광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친히 예루살렘의 영광이 되고, 당신의 영광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예루살렘을 둘러 싸고 보호할 성곽이 되신다.

성곽이 없는 새 예루살렘은 창세기 5장에 나오는 가인이 만든 도시와 대비된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놋 땅에 정착하여 성곽을 쌓았다.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초의 도시의 탄생을 의미하며, 도시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성곽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러나 스가랴가 꿈 꾼 새 예루살렘에는 성곽이 없다. 스가랴의 비전은 평화의 비전이다. 새 예루살렘은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할 높은 성곽의 도시가 아니라, 인간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기초를 흔드는 새로운 정신의 도시가 된다. 하나님의 불 성곽은 하나님의 영의 권세를 가리킨다. 예루살렘을 지킬 보호막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 곧 새로운 정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가득할 하나님의 평화의 영과 평화의 정신은 성곽에 막히지 않아 사방으로 뚫린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이집트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알렉산더와 로마의 제국주의가 역사를 지배했다. 중동과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연안을 짓밟고 지나간 수많은 군사들. 성을 포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굶어 죽게 만들고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지성소에 들어가 성전을 모독한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들. 무너진 성벽의 돌들을 기드론 골짜기로 굴려 버린 수많은 점령군들의 약탈과 피의 도살을 겪은 이스라엘. 이제 새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새로운 꿈을 꾼다. 그것은 높은 성벽의 대 도시 건설이 아니라 성벽이 보이지 않는 정신의 도시이다. 정신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사실 스가랴의 환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 성곽은 그보다 수 백년 앞선 예언자 엘리사가 본 것이기도 하다.

지금의 시리아에 해당하는 아람의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아람 군대의 작전을 미리 내다 본 예언자 엘리사 때문에 아람 왕은 번번히 실패했다. 화가 난 아람 왕은 군대를 몰고 엘리사를 잡으러 왔다. 엘리사의 시종이 아침에 나가 보니 사방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 되어 있었다. 겁에 질린 시종이 엘리사에게 이제 어찌해야 될까 물었다. 그때 엘리사가 말했다. “걱정말아라. 우리와 함께 하는 군사가 아람 군대보다 많으니라.” 시종이 다시 눈을 들어 보니 주변 언덕 가득히 하나님의 불 병거가 늘어서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있었다. (열왕기하 6장)

엘리사는 아람 군의 눈을 멀게 해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유인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독 안에 든 쥐가 된 아람 군대를 전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포로된 자를 죽이는 법은 없다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왕에게 명헸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당분간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않았다.

엘리사가 있던 언덕을 둘러싼 불 병거는 살상을 일삼는 인간의 군대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엘리사는 침략군을 전멸시킬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게 성서의 하나님의 영적 힘이고 성서의 정신이다. 사방을 둘러 싼 하나님의 불 병거는 이민족을 불태워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정화하는 성령의 불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에게 강림한 성령이 불의 혀처럼 보였다는 것도 인간의 혼탁한 정신을 정화하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엘리사나 스가랴가 환상으로 본 하나님의 불병거는 침략자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평화의 도구였다. 인류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도구였다. 그것은 인간의 죄가 막을 수 없고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도하는 평화의 힘이다.

하나님의 불 성곽을 본 스가랴는 이어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평화의 왕을 보았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 9:9-10)

신약 성서에서 예수님이 위엄 있는 큰 말을 타지 않고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은 이 구절에 따른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의 낮은 자가 되어 권력자들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지배의지를 변화시키는 평화의 왕인 것이다. 작은 나라 유다가 병거와 말을 늘리고 화살을 대량생산해서 외침에 대비해도 모자랄 판에, 왕으로 오시는 그 분은 유다의 병거를 끊고 화살을 꺾어 없애겠다니. 니체는 이것을 약자의 윤리라고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예언자들, 그들은 미래를 알아 맞추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의 눈으로 세상의 대세를 거스르는 꿈을 꾸는 비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비전은 강대국의 꿈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강대국들을 이길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의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복과 지배를 좋아하는 저 제국주의 세력들까지도 구원할 수 있는 평화의 영성. 온 인류가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살아갈 새로운 길. 국제사회에서 존재감 없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꾼 꿈은 영원한 평화의 길이었다. 우상숭배를 거부한 그들의 하나님 신앙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좁은 길을 제시했다.

18세기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에 영원한 평화를 꿈꾼 사람이 있으니 그가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는 전 유럽을 휩쓴 17세기의 전쟁을 알고 있었고, 18세기에 폴란드를 강제로 병합한 자신의 조국 프러시아의 전쟁을 겪었다. 신학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영양을 받고, 철학으로는 계몽주의자에 속했던 칸트는 18세기 말에 <영구평화론>을 썼다. 다시 말해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계몽주의적 역사발전론의 합작품이다.

인류는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피 흘리지 않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칸트는 국가를 넘어 전 세계 국민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세계 시민이 되는 길을 제시했다. 그것을 가리켜 그는 자연의 섭리라고 했다.

칸트는 자연의 섭리란 말로 역사의 방향이 그렇게 가게 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사실 칸트는 2천 수백 년 전의 성서의 예언자들의 뒤를 이어 영원한 평화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는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사탄을 이기는 평화의 왕 예수의 권세를 확신했을 것이다. 그가 예수를 인간성의 원형으로 본 것도 그런 의미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국가를 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리라고 칸트가 말한 것은 성서의 하나님 나라를 세속화해서 표현한 것이고, 그가 자연의 섭리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계몽주의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읽어 본 사람은 칸트의 평화의 꿈이 얼마나 성서의 영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칸트가 성서를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성서는 인류의 평화를 위한 보편 정신을 고양시키는 문서임을 말해준다. 칸트는 성서가 반드시 그런 식으로 읽혀져야 한다고 주장한 일종의 성서 해석학자이기도 하다.

성서를 기초로 한 기독교야말로 이성 종교요 도덕 종교라고 말한 칸트의 단언도 그 점을 가리킨다. 은유적으로 표현된 성서의 여러가지 스토리야말로 다양한 합리적 언어로 표현될 풍부한 해석의 보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성서의 기본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표출되도록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성서인 것이다.

200년 전의 칸트의 기대와 달리 세계는 지금도 수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3차 세계 대전의 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그 점에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여전히 일종의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칸트의 환상은 예언자들의 환상처럼 미래의 비전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비현실적 현실이다. 죽음을 얼마 앞두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던 노학자 칸트는 피비린내 나는 프러시아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엘리사가 본 하나님의 불 병거를 보고, 스가랴가 본 불 성벽을 보지 않았을까? 사람의 죄를 이기면서까지 사람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내다보며,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으며, 칸트는 자연의 섭리라는 말로 장차 도래할 세계평화의 필연성을 확신했던 것이다.

사진: 해질 녘의 하늘을 가득 채운 저녁 노을은 마치 그날 엘리사를 둘러 쌌던 불 병거처럼 보였다.(2022.7.30)

그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1842, Hippol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