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2022)

얼마 전에 소련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30여 년 전 나의 청년시절의 기억에 새겨진 그의 온화하고 지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1980년대 말에 그가 벌인 여러가지 일들은 세계를 놀라게 했었는데, 그 시절 유럽에 유학 중이었던 나는 고르바초프를 일종의 혁명가로 인식했고 평화의 사도로 여겼다. 그는 핵무기로 대립하던 냉전 시대를 끝냈고, 비밀경찰의 감시 하에서 감옥생활하던 소련과 동구의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 인민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중시했다. 이른바 페레스토이카라고 불리는 개혁이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했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독립했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독일인들은 고르바초프의 죽음 소식을 접하자 과거를 기억하며 감사를 표하고 있다.

비밀경찰이 활동하며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폐쇄적 공산국가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1989년 브레즈네프 후임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로 부임한 그는 취임 연설에서부터 소련의 개혁과 인민의 자유를 중요시했다. 그는 얼굴의 인상부터 전임자들과 달랐다. 온화하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고 대중에 개방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폐쇄적인 크레믈린 내부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로서 과감했고 확고했으며 대담한 용기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신념으로 세상을 바꾸었다.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협상하여 핵무기를 감축하고, 동구를 방문하여 자유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하라고 독려했다.

1990년 11월 어느날 밤. 나는 수업시간에 잘 안 들리는 프랑스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이어폰을 끼고 라디오를 들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 잠들 무렵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럴리가 있나? 하루 전까지도 유럽에서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던 일이다. 고르바초프의 영향으로 동독에서 자유를 위한 시민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부족한 불어 실력으로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라디오의 아나운서는 흥분된 어조로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 그리고 반복된 보도로 볼 때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설마하는 생각과 함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 채 잠에 빠져 들었다.

그 이후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되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러시아는 민주적 방식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소련 해체를 반대하는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그 여파로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을 사임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서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어 엘친이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의 어머니가 우크라이나인이고 그의 아내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기독교 신앙의 산물이다. 인간 차별과 억압적 국가권력과 청년들이 희생되는 국가간 전쟁은 모두 희생양을 만들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으로서 인간사회의 오래된 죄의 관습이다. 거기에 정식으로 도전한 것이 구약과 신약 성서의 계시이고, 기독교 신앙은 성서의 계시를 바탕으로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그 신학은 서양의 철학과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홉스와 로크 그리고 칸트를 비롯한 근대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성서 해석가들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은 인류의 평화와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대에 기여했고, 그렇게 보면 그는 성서의 정신이 이 땅에 실현되는 데 이바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독재가 끝나고 자유 민주주의의 기운이 러시아에 퍼지는 데 그는 크게 이바지했고, 그 결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실 공산주의도 어떤 면에서 기독교 문명권의 산물이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간 방식이 공산주의라고 했다. 공산주의는 자유보다 평등에 비중을 두고 경제적 평등을 통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자유와 평등은 모두 기독교적 가치이고, 그래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기독교윤리를 이룬다. 다만 인간 역사는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근대에 들어 기독교 문명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데 치중했다.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하고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하던 인류의 오래된 관습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구의 자유주의는 기독교에서 생겨난 것이면서 기독교를 벗어나 무신론과 세속주의로 흘렀다. 세속주의와 결합한 자유주의에서 생긴 불평등의 모순이 극대화 되면서 경제적 평등의 사회를 만들려고 한 것이 공산주의이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도 서구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지나친 권리주장보다 감사와 겸손의 미덕을 지닌 러시아 민중의 신앙심이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생각했다. 국민의 70% 이상이 러시아 정교에 속한 러시아인들은 지금도 서구의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러시아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한다. 푸틴은 러시아의 애국심을 고취시킬 때에 그 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정립된 서구 기독교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모순은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된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기독교 윤리를 가지고 세속화된 서구 개인주의를 비판했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계급혁명을 통해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공산주의 체제를 하나님 나라라고 여겼다. 그 결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포의 감시체제가 형성되고, 여론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공산당의 권력은 권위적이고 전체주의적 체제를 형성하며 동시에 부패했다.

고르바초프는 기독교적 가치에서 생긴 평등주의의 체제에서 권력자가 된 후에 또 다른 기독교적 가치인 자유와 민주의 길을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은 모두 중요하지만 역시 자유를 기반으로 평등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고 성서의 정신이기도 하다. 오늘날 민주국가들의 복지 시스템의 형성은 자유를 전제로 해서 불평등을 줄여 나가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매우 낮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어 강대국으로서의 러시아의 위상이 추락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 푸틴이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것도 그런 민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푸틴의 예비군 동원령에 반대하며 이스탄불과 조지아와 핀란드로 이주하는 러시아 청년들은 당당하다. 조국 러시아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푸틴을 위해 죽기는 싫다고. 주권국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간 지금의 전쟁은 조국의 전쟁이 아니라 푸틴의 전쟁일 뿐이라고. 그들이 징집령을 회피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고르바초프가 열어 놓은 자유와 민주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서방의 많은 학자들이 말하는대로 그는 위대한 변화를 가져온 인물임이 분명하다.

1990년 그 날 밤의 충격이 생각나 몇 자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