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향해 가는 11월 중순.

날씨는 쌀쌀해 졌지만 아침 햇살은 언제나 축복의 빛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 잎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두툼하게 밟히는 낙엽들은 산책을 위해 깔아 놓은 주단과 같다. 관리하는 분들이 열심히 낙엽을 쓸지만, 그렇게 밟고 갈 수 있도록 산책 길에 손을 대지 않은 배려가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잎 큰 낙엽들. 어린 시절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 입을 벌리고 이리저리 뛰며 좋아하던 즐거움과는 또 다르게, 내리는 낙엽을 보는 시선에 찬란한 아름다움이 없지 않다. 무언가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낙엽을 맞는다. 땅에서 끌어올린 양분으로 하늘을 향해 자랐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나뭇잎. 낙엽은 흙냄새를 가진 하늘이다. 또는 하늘을 담은 땅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얼굴로 맞으며 천천히 걷는다.

새들이 열심히 지저귀는 소리는 아침의 음악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의 음악 소리보다 생명이 넘치는 것이 있을까. 극장의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주는 아니지만 새소리는 아침 햇살을 닮아 투명한 생명력으로 귀를 울린다.

얼마 전 세계적인 콩쿠르에 나가 피아노 건반을 열정적으로 두드리는 우리나라 청년들의 연주를 듣고 또 들으며 빠져 들었다. 음악은 얼마나 위대한 위로의 힘을 갖고 있는지. 눈처럼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언어를 잡아 보이지 않는 스토리를 만든 것이 음악이 아닐까. 아니면 땅의 이야기를 담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노랗고 붉은 낙엽의 바람을 잡아 곡으로 만든 것이 음악이 아닐까.

언제 재개발 되어 사라질지 모를 오래된 동네의 골목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 동생들과 동네 아이들과 시끄럽게 떠들고 놀던 그 넓던 마당이 아마 이만한 골목길이었을테지. 이웃 집 아저씨가 술먹고 밤늦게 들어와 아주머니와 다투던 소리까지 다 들리던 동네 골목길. 그때는 이런 콘크리트 집은 아니었고 나지막한 담장들이 만든 골목길이었지만. 막다른 골목길이 보이면.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늘 궁금했었다. 담장 너머로 높이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동네를 다 내려다 보는 나무의 은행잎들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양철 지붕 위에서 풍성한 모습으로 빛난다.

골목을 벗어날 무렵 엉거주춤 서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 온다. “어머니 왜 나와 계세요?” 아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음지에 서서 웅크린 자세로 말한다. “네가 나와 있으니 나도 나왔지.” 아들과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목소리. 아들은 사십대 중반은 되어 보인다. 어머니는 양지로 가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음지에 서 있다. 그것도 아들 옆으로 가지 않고 좀 떨어진 채로. 세상은 바보로 여겨도 어머니에겐 둘도 없는 소중한 아들이겠지. 그래, 옛날엔 동네에 사람들이 바보라고 부르는 청년이 있었다. 아마 요즘 같으면 고쳤을 병이었겠지. 힘세고 마음 좋은 바보를 아이들은 놀려대고, 쫓아 오면 도망가곤 했다. 네가 나와 있으니 나도 나왔지. 뭔가 애달픈 정적이 흐르는 속에서 내 걸음은 골목 길을 벗어났다.

아파트가 서 있는 길을 오른다. 봄에 목련이 아름답게 피었던 곳이다. 오래된 천주교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신자들이 합창으로 하는 기도 같은데, 꼭 절에서 염불 외는 소리와 비슷하다. 산책 길은 산 속으로 접어든듯한 느낌.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오래 되어 조선시대의 운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교회의 십자가와 나란히 서 있는 은행나무가 이곳 오래된 땅에서 오고 간 민중들의 기도소리를 기억하고 있는듯 하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존재에 참여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오늘 하루도 당신의 지혜에 참여하여 생각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