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하얗게 내리니 보기 드물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나 보다. 눈은 인간 세상의 윤곽을 덮는다. 덮는다고 사라지기야 하겠는가. 하늘의 눈이 덮어준다고 이 땅의 오염과 소란과 혼란이 없어지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은 그림을 새로 그리도록 해주는 희망의 선물인 것 같다. 기존의 세상 위에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삶과 새 세상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능성이다.
세상으로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념에 젖어 천천히 산책길을 걸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내면서 조용히 눈내린 아침을 맞이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서는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른다. 그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분은 우리 위 높은 곳 하늘로부터 우리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성서의 얘기에는 화려함이란 찾아 볼 수 없다. 성 밖의 들에서 자던 목자들, 여관방이 없어 마굿간에서 해산한 마리아, 침대가 아닌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누가복음에 따르면 결국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고 경배한 이들은 목자들이었다.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목자들은 양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양떼를 돌보는 일종의 일용 노동자들이다. 성서는 그들이 성 안이 아닌 성 밖 한 데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임을 강조한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지극히 작은 자들,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맞이한 이들은 그들이었다.
마리아의 찬가(누가 1:46-55)는 어떤가. 비천한 자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온다. “내 마음이 내 구주를 기뻐함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보좌에서 끌어내리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 마리아의 찬가 한편에는 비천한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 가난한 자가 있다. 반대 편에는 교만한 자, 통치자, 부자가 있다. 하나님은 후자를 낮추시고 전자를 높이신다. 마리아 찬가의 주제는 비천한 자의 존엄함이다.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존엄하게 만드신다. 비천한 자의 존엄함.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열국 중에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였던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신명기 귀절을 외우는데, 그것은 우리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구절이다. 이집트에서 학대 받고 노예로 중노동에 시달리던 조상의 후손이 이렇게 가나안 땅에서 넉넉하게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임을 끝없이 되 뇌인다. 노예의 후손이 하나님 때문에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었다. 비천한 자의 존엄함이다. 마리아의 찬가는 구약성서의 연장선에 있다.
크리스마스의 메씨지는 비천한 자의 존엄함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요, 낮은 자요, 비천한 자로 느끼면 존엄한 자가 된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요, 세상에 평화를 심는 자가 될 것이다. 천사들이 부른 크리스마스 캐롤은 이렇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 2:14) 하나님이 기뻐하신 이들은 비천한 자의 존엄함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권세와 다른 권세가 있다. 그 평화와 권세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비천한 자의 존엄함은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 그들은 학자들이요 물질이 풍요로운 이들이라, 값비싼 예물을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 드렸다.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작은 고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아기를 그리스도로 알고 경배하는 자는 겸손한 자이다. 누가복음에서 말한 비천한 자란 겸손하고 겸허한 자라는 뜻도 지닌다. 동방박사들은 가난한 자가 아니지만 겸허한 자로 비천한 자가 되어 존엄함을 갖춘 자들이다.
그러나 헤롯 대왕은 어떤가? 그는 자신을 대체할 권세자를 없애기 위해 수많은 아이들을 죽였다. 성서는 그리스도 탄생의 얘기를 왜 아름답게 그리지 않고,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얘기를 적어 넣었을까?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청년들 때문에 베들레헴의 죽은 아이들과 통곡하는 어머니들의 얘기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어제 독일에서는 2차 대전 당시에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된 재판이 열렸다. 97세의 노인인데 당시 18살로 수용소 사령관의 여비서로 있었다. 그녀는 그런 학살이 진행되는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재판관들은 비서의 직무상 사령관에게 오는 문서를 통해 유대인 대학살의 참상을 몰랐을 수 없었다고 본다. 더구나 사무실 창 너머로 바로 수용시설과 개스실이 있었다고 한다. 재판관들은 유죄를 선고하고 집행유예 2년에 처했다. 그녀가 어린 나이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 너무 고령이라 형집행의 실효성이 없어서 적은 형량과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이번 재판은 독일인들이 자기들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를 끝까지 추적하여 심판하려는 참회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원래 나치 관련 재판은 직접 개입된 나치 수뇌부들과 학살 명령자의 지위에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2011년부터는 명령 수행자들이나 경비원이라든지 민간인이면서도 학살을 도왔던 조력자들까지 처벌을 시작했다. 그동안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은 범죄자들이 죽었고, 이번 재판이 아마 마지막 재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의 죽음과 학살 장면들은 볼 때마다 참담하다. 가스실에서 죽은 이들,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은 이들, 추위에 방치되어 얼어 죽은 이들, 노동하다 죽은 깔려 죽거나 병에 걸려 죽은 이들. 총살당한 이들.
마태복음에 나오는 헤롯의 대학살 이야기. 그것은 200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지속되는 일을 보여준다. 끝없는 전쟁과 대량 학살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폭력.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이 마주칠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통곡 소리, 목자들처럼 일용직 노동 시장을 전전하며 삶을 지탱해 가는 이들, 미래가 보이지 않아 절망 속에 빠진 청년들,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 제국주의적 패권 경쟁 속에서 조국의 영광을 외치며 피를 부르는 군중들. 그들을 끌어 안고 새 세상을 이루기 위해 그들 속으로 하나님이 오신다.
모순되고 비극적인 인간 세상 한 가운데로 그리스도가 오신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요, 그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폭력의 악순환을 사랑과 용서의 선순환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평화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존엄한 자가 되는 일로 가능하다. 십자가와 부활도 바로 그 점을 보여주는데, 십자가는 비천한 모습이요 부활은 존엄한 자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메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것도 비천한 자의 존엄함으로 인도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자로서 존엄하게 되는 자가 의인이다. 마태복음 1장에서 요셉은 의인으로 표현된다. 약혼녀 마리아가 자신과 관계없이 임신한 사실을 안 요셉. 성서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1:19)고 말한다. ‘의’는 ‘정의’와 다르다. ‘의'(righteousness)는 신학개념이고 정의(justice)는 법적이고 도덕적 개념이다. 법에 따르면 처녀가 임신을 하면 공개처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요셉은 정의의 법대로 하지 않고 의로운 일을 행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자로 존엄함을 가진 자요, 법을 넘어 낮은 자세로 사람을 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천한 자로서 존엄하므로 남들이 비웃어도 흔들리지 않는 영적 권세를 가졌다. 그가 조용히 헤어지려고 한 것은 정의의 훼손이 아니라 정의의 완성이다. 정의를 망가뜨리고 악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너머로 사람을 살려서 경건과 사랑으로 사람을 품고 정의를 완성하는 자. 그것이 성서적 개념의 의인이다. 요셉은 비천한 자로서 존엄한 자였기 때문에 의인이었고 그리스도 탄생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사건에 등장하는 목자들과 마리아와 요셉과 동방 박사들. 크리스마스는 인류 전체를 비천한 자의 존엄함으로 인도하는 사건이요, 헤롯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 틈을 내고 좁은 길을 만들어 비천한 자로 존엄하게 된 자를을 통해 새로운 평화를 정착시키고 넓혀가시는 하나님 역사의 시작이다.
그림: <그리스도의 탄생> 12세기 호헨부르그 수도원의 수녀가 그린 그림. 중세의 호헨부르그 수도원은 현재는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보주 산맥 속에 있는 몽생토딜 수도원(Mont Saint-Odil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