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고 문서이다. 수 천 년 전의 문서를 읽으며 영혼을 울리는 영원한 말씀을 느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흐르지 않는 영원 안에서 인간의 시간이 흘러 지나간다고 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지나가지만 우리가 겪은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 안에 있다.
첫 번 째 이야기.
이집트를 나와 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하던 이스라엘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보다 큰 민족들을 내보내고 하늘 높이 솟은 성벽의 도시들을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이민족 정복의 역사로 보면 안 된다. 억압과 피로 물든 전쟁이 그치지 않는 인간 세상 한 가운데에 사람을 보호하고 평화를 확장하기 위한 거룩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봐야 한다. 남을 죽여야 사는 폭력의 죄를 이기고 사랑의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방에 보이기 위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은 그 일을 위해 선택된 백성이다.
그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사람이 하려고 해서는 사람과 부딪힌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은 그 뒤를 따르는 것 뿐이다. 성서는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너는 분명히 알라. 네 하나님께서 네 앞에 나아가신 즉 그들을 파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그들을 멸할 것이라.”(신명기 9:4)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다. 성서는 가나안 입성이 이스라엘의 공적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해 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들여서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심이라.”(9:5)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동해서 그 보상으로 가나안 땅을 주신 게 아니다. 다만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 남도다 우월하다는 교만이 아니고는 평안을 찾지 못하는 인간 세상의 죄를 물리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성서는 거듭 되새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온 직후부터 가나안 땅을 코 앞에 둔 시점까지 오랜 세월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 때문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광야에서 네 하나님을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라.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였느니라.” (9:6,7) 이스라엘은 죄로 말미암아 가나안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 이스라엘이 부인 되고 하나님의 주권이 선다. 이렇게 부인된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와 알렉산더의 폭력적 제국주의를 극복할 평화의 대로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마침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베드로)의 배가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를 타시고 호수가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말씀이 끝난 후에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곳으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라”. 시몬은 답했다. “밤새 열심히 일했으나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올라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다른 배에 있던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해 안드레와 야고보가 합세하여 그물을 들어 올리니 고기가 너무 많아 배 두 척이 모두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그때에 시몬이 꿇어 엎드렸다. “주님, 제게서 멀리하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누가 5:8).
사람의 힘이 다한 곳에서 발생되는 그리스도의 능력. 철저하게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한 자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 ‘죄인이니 당신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능력을 보고 달라 붙어 더 큰 복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절대 초월자의 권능. 그 권능은 사람의 자신감과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몸에 익은 기술, 당연하게 얻어지는 일상의 소득과 관습을 모두 무로 돌린다.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자신의 능력이 완전히 부인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부인되는 것이다.
시몬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죽이고 무아가 되었다. “나는 죄인입니다. 제게서 떠나시옵소서” 이것은 무아를 표현하는 성서적 언어이다. 그 때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렇게 시몬은 부인되고 부인된 시몬 베드로를 통해 인류를 구하는 하나님의 구원사가 시작되었다.

세 번 째 이야기.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서에서 쉼이란 일하지 않는 게 아니고 궁극적 안정과 자유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후 안식하셨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안식이 있다. 안식은 완성을 가리킨다. 구원의 궁극적 상태를 가리켜 안식이라고 한다. 의심이 없고 두 마음의 싸움도 없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유롭게 한 마음으로 사랑할 때에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런 안식을 주시는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멍에를 같이 메면 행실과 걸음걸이를 같이 할 수밖에 없다. 그 분의 걸음이 내 걸음이 되고 그 분의 행실이 내 행실이 된다. 멍에를 통해 그분과 나는 하나가 된다. 그 분의 의가 내게 전가 되고, 그 분의 마음 씀씀이가 내게 전가 된다. 내 의지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멍에가 그렇게 만든다.
처음에는 그 분의 발걸음과 내 발걸음이 어긋날 것이다. 보조를 맞추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서 배우라”고 하셨다. 멍에를 같이 메고 가다 보면 배우게 된다. 그 분은 강압적으로 배우도록 하지 않는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그 분의 온유와 겸손은 어디서 나올까? 그 분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렸다. 자신의 행동과 말이 자신의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 자기 부인. 그것이 그 분을 온유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든다. 멍에를 같이 매면 그분에게서 배워 우리도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앞 세운다. 그렇게 우리 영혼은 안식을 얻으며 구원의 길을 간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여전히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현대사회는 인간의 자기 성취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기 멍에를 같이 메라고 하신다. 그러나 멍에는 무거운 짐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 분이 말씀하신다. ” 내 멍에는 가볍고 내 짐은 쉬움이라.”(마태 11:30) 무거운 것 같지만 가벼울 수도 있다. 어려울 것 같지만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무겁지만 그리스도가 그 무게를 감당하시고 어렵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고난을 감당하신다. 그래서 그 멍에가 내게는 가볍고 쉬워진다. 멍에를 맨다고 너무 어렵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같이 맨 자다. 내 실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력으로 일하고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앞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나의 구원과 안식이 있으리라.
가나안 입성에 앞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시몬을 만난 예수의 말씀, 멍에를 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지금도 피 흘리고 죽이고 죽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지금도 수 천 년 전의 음성 그대로 우리에게 들리는 구원의 말씀이다. 나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영원한 말씀이다. 인간이 만드는 죄와 고통의 시간이 흐르지만 그 시간은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 안에서 흐른다.
사진: 1. 성경의 앞 뒤를 둘러싼 금속 장식판 : 우주의 통치자 그리스도, 12세기 스페인 작품
2. 성경 장식 금속판: 가운데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네 면에 우주의 통치자 그리스도가 조각되어 있다. 촬영: 프랑스 파리 중세 박물관(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