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들에게 여러 번 예고했던 수난을 향한 길이다.
1 여리고는 평지의 도시이고 산 위의 도시인 예루살렘과 멀지 않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지나시다가 삭개오를 만나시게 된다.
삭개오란 자는 세리장이었으니, 아마 지금으로 말하면 여리고 지방국세청장 쯤 될 것 같다. 세리는 오늘날 국세청 공무원을 가리킨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금징수를 달가워할 국민은 없다. 더구나 이천년 전에 유대인들은 헤롯 왕과 로마에 따로 세금을 내야했고 또한 성전세라고 해서 일종의 종교세를 내야했다. 소득을 추적해서 삼중으로 세금을 거두어가는 세리들을 일반인들이 좋아할 리 없다. 더구나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것은 곧 민족의 배신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세리들은 거둔 돈의 일부를 착복하여 배를 불리었으니, 대개 부패한 자들이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요, 성서는 그가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에 사람들은 삭개오의 부를 부러워하기도 했겠지만,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요, 민족을 배신한 자로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리들을 가리켜 ‘죄인’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죄인이란 종교적 판단이요,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삭개오는 예수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키가 작아 볼 수 없어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수께서 보시고 내려오라고 한 후에 그날을 그의 집에 머무르시기로 했다. 물론 삭개오는 뜻하지 않은 예수님의 환대에 뛸듯이 기뻤을 것이다. 즉시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안내했다.
이것은 대단한 스캔들이다. 스캔들이란 스칸달리온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인데,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시험에 들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악질적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 어쩌면 그는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사람들의 미움을 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선지자께서 그런 자를 나무라지 않고 그 집에 들어가 머무시며 대화를 나누시다니.
사람들이 시험에 든 그 일에 삭개오는 감격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했다. 사람을 속이거나 위협해서 돈을 갈취한 게 있으면 네 배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 집에 구원이 임했음을 선포했다.
삭개오는 돈밖에 모르는 자요, 오랜 세월 사람들을 다루며 마음이 굳어진 자였으리라. 사람들이 죄인 취급할 수록 그는 더 방어적이 되어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환대를 받고 수 십년 간 굳어졌던 마음이 무너졌다. 갖은 수법을 동원해서 모은 돈을 풀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몇 배로 속죄하는 행위. 그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구원을 선포하신 이유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죽음의 길을 가시는 중에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있었다. 그가 죄인 삭개오이다. 그는 콘크리트를 뜷고 나온 푸른 풀이요 보도 블럭 사이로 피어난 노란 민들레 꽃과 같다. 회개하지 않는 굳어진 세상 속에서 어린애처럼 감격하며 자기를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와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인 것이다. 누가복음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가시는 죽음의 길 위에 생명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다.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나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2. 예수께서 벳새다를 지나 올리브 산을 내려가는 길목에 이르셨다. 올리브 산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성을 마주보는 곳이다. 군중들이 길에 겉옷을 깔아 놓아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왕이 지나는 길처럼 만들었다. 왕의 길에 까는 붉은 주단과 비교할 수 없으나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예의였다. 그리고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부탁했다. 저들을 꾸짖으십시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군중의 함성은 신성모독이다. 예수를 선지자로 보는 것은 트집잡기 어려우나, 군중은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있었다.
군중은 예수에게서 ‘하늘의 평화’를 보았다. ‘하늘의 평화’는 사탄을 무찌른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 사탄은 더이상 하늘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께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배하는 하늘의 사탄을 제거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이신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은 하늘 위의 하늘이니 하나님 아버지의 자리이다. 하늘에 평화를 정착시킨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다. 성자는 하늘을 깨끗이 함으로써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신 성부께 영광을 돌린다.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고 외친 군중의 함성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행위이다.
세상 사람들의 지극히 일부가 예수를 메시아로 알며 찬양했다. 그것도 유명한 자들이 아니고 권세자들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들이요 이름 없는 자들이 얼마 모여서 예수를 환영한다. 그들은 인류를 대표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치리라.’ 사람이 안 하면 자연이 한다. 딱딱한 돌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진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을지 모른다. 예수님에게는 들리는데 사람들에게는 안 들린다. 이미 세례요한이 말했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식을 만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3. 올리브 산을 내려가 계곡을 건너 예루살렘이 가까워지자 사방을 둘러싼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예수께서 우셨다. “네가, 정말 너라도 오늘 무엇이 평화를 가져올지를 알았더라면. 그러나 그 일이 너희 눈에는 가리워졌도다.”
결국 평화의 문제였다. 군중들이 외친 것도 ‘하늘의 평화’이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이유도 평화 때문이다. 돌아보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부른 찬양도 평화였다. 하늘의 평화 이후 도래할 이 땅의 평화.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이 몸부림치며 권력자들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고, 사탄이 종교인들 속에 들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도록 만든다.
평화의 실마리가 어디에 있는지 세상은 모른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택함 받은 도시 예루살렘도 모른다.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예루살렘. 정치와 종교가 예수를 죽일 것이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지만, 종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 제일 먼저 성전에 가서 분을 토하셨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를 이용해 군림하고 부를 쌓는 자들.
평화의 왕 그리스도의 피를 흘린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수가 아니라 평화의 길을 원치 않는 인류의 운명이다. 예루살렘은 인류의 모든 도시를 대표한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실패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원래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인류가 서로 섬기며 평화의 세상이 되기를 바라셨다. 인간의 죄로 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마침내 십자가를 통해 평화의 길을 제시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은 다 하셨다. 그러나 끝내 인류가 돌이키지 않고, 예루살렘이 파괴되듯 인류 문명이 인간에 의해 파괴된다면 하나님의 뜻은 끝내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대다수 사람들을 버리고 자신이 택한 자들을 데리시고 나중에 따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실 것인가?
그러나 삭개오가 있지 않은가. 삭개오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돌들이 있다. 자연이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가. 감격에 찬 삭개오의 고백과 돌들의 찬양소리를 듣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실 것이다.
2023년의 사순절에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그리스도의 눈물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 거룩한 슬픔의 저 편에서 들려오는 삭개오의 음성 그리고 돌들의 찬양 소리를 들어보자.
사진: 올리브 산 밑 기드론 골짜기에서 본 예루살렘 성벽. 예수께서 보시던 성벽은 서쪽의 이른바 통곡의 벽 일부를 제외하고 AD 70년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무너져 사라졌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한 슐레이만 황제가 쌓은 성벽이다. 2014.2.12.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