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렸다. 한강 하구 둑 너머로 남아 있는 논들이 하나 둘 없어져 가는데, 어디서 개구리가 우는가? 아직 모내기도 하지 않았는데 개구리들이 어디서 모여 울고 있는가? 아니, 그보다도 5월 초에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리다니. 지구 온난화가 여러가지 변화를 만드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몇해 못들었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니 반갑다. 덩치는 작지만 밤에 울리는 개구리 울음 소리는 공명이 되어 천지를 채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개인지 비인지 모르게 산이 가리워졌다. 앞산은 보이는 데 멀리 있는 뒷 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동파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7-8년 전에 이 선생님이 내게 선물한 합죽선에 올려져 있는 구절이다. 그 분이 직접 멋진 필치로 써 준 시구가 맘에 들어 여름에는 그 부채를 꼭 옆에 두고 지낸다.

“산인지 구름인지 멀어서 잘 모르겠네. 안개 걷히고 구름 흩어지니 산은 그대로 그렇게 서 있네.” (山耶雲耶 遠莫知 煙空雲散 山依然)

초여름에 안개와 구름이 자욱히 끼어 산을 가려버린 산천의 풍경을 잘 그려냈다. 공기가 습해지고 구름이 엉기어 하늘을 덮으면 늘 보이던 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을 덮은 구름이 하루를 가겠는가 한달을 가겠는가. 안개와 구름은 곧 증발되어 사라지게 되어 있으니, 그때 산은 언제나처럼 제자리에 우뚝 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소동파가 말한 안개와 구름은 세간의 인심일 수 있다. 무지와 모함이 세를 얻어 온 세상을 채우면 바른 사람은 자취를 감추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 세간의 포악한 인심이 안개처럼 사라질 때에 가려졌던 푸른 산이 드러나듯 바른 사람은 드러나지 않을까. 다만 군중의 모함에 놀아나 분주하게 변명하러 다니지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 잘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에서 시골로 낙향한 소동파는 자연의 풍광을 읆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듯하다.

소동파의 시에는 유학의 낙관주의가 잘 드러나 있다. 악이 강한 것 같아도 결국 선이 이긴다. 퇴계 선생도 말씀하셨다. 당장은 기가 강하고 이가 약한 것 같아도(氣强理弱) 길게 보면 결국 이가 강하고 기가 약하다(理强氣弱).

理가 氣를 이기기 위해, 다시 말해서 진리(眞理)가 죄의 힘(氣習)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곧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니 궁극적으로 낙관적이긴 하지만, 유학보다는 세상의 죄를 더 심각하게 보는 셈이다.

아침 안개는 비로 바뀌어 주룩주룩 제법 많은 빗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초록의 풍경은 더 선명해지고 빗물 흐르는 보도는 거울처럼 사람들의 그림자를 비춘다. 산들 바람 불어 나뭇가지 가만히 흔들리니, 바람은 땅끝에서 온 전령사처럼 생명의 기운을 전한다. 낮인데도 천지가 어둡지만 사방에 들어차는 생명의 기운은 더욱 뚜렷하다. 5월의 축복을 읽는다.

사진: 2023년 봄 어느날 아침 창으로 내다 본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