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바뀌었다. 아직 낮에는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완연하다. 250년 전쯤 인왕산 기슭에 집을 짓고 살았던 겸재 정선이라면 이맘때쯤 초막에 앉아 백악산 흰 바위에 내린 볕의 색깔이 변한 걸 보고 있었겠지. 가을이 오고 있음을 좋아하면서. 아니면 집을 나와 조용히 걸어 수성동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머지 않아 계곡 물이 마를테니까 말이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놀았던 기억에 의하면, 원래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물이 많지 않다. 겸재의 그림 <인왕제색도>에는 폭포가 보이지만, 그건 그림 제목대로 막 비가 그친 다음에 그린 그림이라 그런 것일 뿐, 평소에는 폭포를 볼 수 없다. 그나저나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허허실실의 자세는 요즘에 들어 부쩍 그 맛을 알 것 같다.
오랜 만에 봄에 다니던 길을 찾아 산책에 나섰다. 몸에 좀 도움이 될까해서 동네를 벗어나 꽤 크게 도는 산책로인데, 내 나름으로 A 코스라고 이름붙인 길이다. 여름동안 잘 안 갔는데, 바람이 선선해져 용기가 붙었는지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봄에 떨어진 벚꽃 잎이 분홍빛 주단처럼 깔려 있던 가로수 길은 나무 그늘로 덮이어 고요하고 쾌적하다. 원래 차가 많지 않은 곳이라 내가 좋아하는 길인데, 열기를 빼낸 바람이 스치니 공간이 차분해진다. 열정을 내야할 때가 있고, 몸의 힘을 빼고 정열을 거두어야 할 때가 있겠지.
이 동네엔 공터가 곳곳에 보인다. 뭔가 세련되지 않고 엉성한 구석들이 곧잘 눈에 띈다. 그러나 그 엉성함이 산책 길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사실 엉성함이 없으면 숨을 어디로 쉬겠는가. 엉성함이야 말로 고도의 생명력인 것 같다. 현대 문명은 그 엉성함을 잃어 버리고 있다. 사람이 자꾸 채워 나가고 빈틈없이 만드니, 생명력이 시들어 가는 것 같다.
몇 해 전 호주에서 몇 개월 간 꺼지지 않은 대재앙의 불, 얼마 전 캐나다에서 한반도 면적 만큼 태워버린 대형 산불, 그리고 서양 문명의 산실인 아테네를 해마다 위협하고 있는 그리스의 산불. 봄이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우리나라의 산불도 그 피해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수학과 과학기술로 지구를 빈틈없이 채워가는 현대 문명이 기후변화로 인한 대재앙을 일으키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틈새가 보여야 하는데… 규격에 맞지 않는 엉성한 틈새를 그냥 놔 두어야 하는데… 사실 그 엉성함은 사람이 놔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새 지역의 외곽 길로 들어섰다. 요즘에 가능하면 생각을 비우려고 노력하는데, 나도 모르게 생각에 골몰했던 모양이다. 언제 벌써 이 길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같은 곳에서 나무로 만든 밥상과 소반을 팔려고 벌여놓고 있는 아저씨, 봄에 목련이 많이 피어 있었던 낮은 연립주택 단지와 작은 공원, 그리고 늘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던 작은 공장을 지났을텐데, 하나도 생각이 안난다.
시맨트로 포장한 하얀 길 양쪽으로 작물들이 자라 수북히 서 있다. 콩이며, 참깨와 들깨, 그리고 옥수수가 꽤 자랐다. 이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는 모양이다. 사실 길 양쪽은 포장 공사 후 남겨진 땅이요, 폭이 매우 좁아 버려진 땅이다. 그런데, 봄에 농부 부부가 그 척박한 땅에 열심히 호미 질을 하더니, 때가 되어 이렇게 작물들이 컸다. 노동하는 노 부부를 보며 “땅을 붙여 먹는다”는 표현이 생각났었다. 조그만 띵이라도 놀리지 않고 뭔가를 길러 먹어야 했던 가난한 시절의 말인 것 같다. 이곳에서 농사짓던 원주민들은 대개 부자가 되었는데, 그분들은 농부의 마음가짐이 몸에 배어 그렇게 부지런히 사는 것 같다. 이제 곧 흐뭇하게 열매를 거두겠지. 큰 돈은 안 되어도 뿌린 만큼 거두는 농사는 정직한 노동인 것 같다.
철로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멀리 수도원의 십자가가 보인다. 신촌의 대학에 부임했을 때, 매일 통일호 기차를 타고 서쪽에 지는 태양을 보며 퇴근했었다. 기차가 지나가듯 그 시간도 지나갔다. 기차가 내 앞에서 지나가듯 그 시간도 내 앞에서 지나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있으니.
그림: 겸재 정선의 집. 겸재는 자신의 집을 인곡유거 또는 인곡정사라고 불렀다. 인왕산 계곡, 지금의 옥인동에 있었다. 그림 속 겸재가 밖을 내다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