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파라오가 야곱에게 물었다. “나이가 몇이나 되오?” 야곱이 답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심년입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년수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짧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세기 47:9)
야곱은 나이 백 삼십에 아들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 간다. 백삼십 살을 적은 나이로 여기는 것은 아마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떠올려 하는 말인 것 같다. 아버지 이삭은 180세에 죽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장사되었으니, 자신이 살아온 세월은 조상들에 비하면 짧다는 얘기인 것 같다.
백 삼십이면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산 사람도 지난 세월이 짧게 여겨질 수 있다.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은 세월. 그 짧은 세월에 겪은 일은 수 없이 많다. 나이를 묻는 파라오에게 자기 삶을 정리하는 야곱의 한마디. “짧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왜 성서는 이런 구절을 남겼을까? 성서의 리얼리즘인가? 사람은 누구나 험한 세월을 사는가? 나이들어 지난 삶을 돌아보면 누구나 힘든 세상살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가?
그러나 야곱은 성공한 사람이 아닌가. 그는 아내를 얻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지팡이 하나밖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는 큰 가족을 거느리고 수많은 가축을 가진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형 에서의 마음을 사기 위해 준비한 선물만 보아도 그의 재산을 가늠할 수 있다. 암염소 이백, 숫염소 이십, 암양 이백, 숫양 이십, 젖 나는 낙타 삼십, 암소 사십, 황소 열마리, 암나귀 이십, 새끼 나귀 열 마리. 전부 합하면 오백 열 마리이다. 얼마전에 방송에 보니 몽골 초원에서 염소와 양 300 마리를 키우는 가족이면 큰 부자라고 한다. 그런데, 형에게 줄 예물로 준비한 가축의 수만 오백 마리가 넘으니 야곱이 얼마나 큰 부자인지 알 수 있다.
야곱은 자식 농사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자식의 수효도 많지만, 아들 요셉의 성공은 지난 세월의 모든 고생을 보답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요셉은 이집트에서 파라오 다음 가는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총리대신이 되었는데, 파라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집트 제국의 상당한 권력이 그의 손에 쥐어 있었다.
“짧지만 참으로 험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총리 대신이 된 아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정에 들어와 파라오를 알현하는 아버지의 말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아들이 아무리 잘 되어도 자신의 삶에 남은 그림자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물론 그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외삼촌 집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7년을 일했으나 외삼촌이 첫째 딸 레아를 신방에 넣는 바람에, 야곱은 다시 칠년을 일해 그가 원하던 라헬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을 일하며 외삼촌을 도운 후에야 가족들을 데리고 독립할 수 있었다. 총 20년을 외삼촌 집에서 머물며 외삼촌의 횡포를 겪어야 했으니, 큰 고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 관계에서의 어려움, 가까운 사람들의 배신 등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다.
또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을 시기한 형들이 그를 팔아 넘겼고, 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짐승에 의해 찢겨 죽은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으로 살았던 세월의 아픔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을 만난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은 또한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재산의 일부를 떼어 형에게 예물로 바쳐야 했다.
그렇게 보면 야곱의 삶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성공한 사람 야곱도 “참으로 험한 세월을 살았습니다.”라고 말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종교적으로 매우 신심이 깊어 축복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는 밤새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는데, 어떻게나 힘이 센지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 씨름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를 붙들고 몰두하고 집중한다는 뜻이니, 그만큼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그 결과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야곱에게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신앙이 좋은 사람도 모든 일에 감사만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사람이고, 야곱도 예외없이 삶의 쓰디 쓴 경험들로 인해 그 마음에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히브리인의 신앙심을 보이기 보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아픔을 말했던 것 같다. “참으로 험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삶을 가리켜 나그네 생활 130년이라고 했다. 나그네란 집없이 떠도는 자요, 혹시 집에 머물더라도 주인이 아닌 객을 가리킨다. 물론 야곱은 가나안에서 정착 생활을 한 사람이고, 아들들로 하여금 멀리 가서 양털을 깎게 할 정도로 넓은 지경을 지니고 안정된 생활을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은 나그네 길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세상에 마음 붙일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은 모두 각자이고, 자기 살기 바쁘다. 결국 사람은 스스로 독립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맹자는 대장부론을 통해서 그 점을 말했다. 마음을 하늘의 도에 붙이고 거기에 평안하고 든든한 자기 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 때에 사람은 “가장 큰 집에 거하고 가장 바른 자리에 서는 것”(居天地廣店 立天地正位)이다.
기독교 신앙은 일찍이 두 왕국론을 말했으니, 그리스도인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모두 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맡은 역할을 잘 해내야 하지만, 마음의 중심은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세상에서의 역할과 독립된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자기 세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말하자면 영적인 사람은 이중 생활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는 이중 생활이다.
물론 세상이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에서 독립된 자기 세계를 갖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더욱 더 이 땅의 삶을 나그네 생활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예수의 말씀도 새롭게 다가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께서도 나그네 길을 가셨다. 인생을 나그네 길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그네 생활은 pilgrimage, 곧 순례자의 길을 가리키니 말이다.
사진. 순레자의 길(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