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바탕데르(Robert Batinder, 1928-2024)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대통령 마크롱이 참여하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전 국민이 1분간의 침묵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판테온에 안치될 예정이다. 판테온은 인류의 진보와 프랑스의 발전에 이바지한 프랑스의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언덕에 높이 솟은 고색 창연한 건물로서 관광명소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미라보가 처음으로 판테온에 안장되었고,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 디드로가 묻혀 있다. 빅톨 위고나 에밀 졸라, 생택쥬베리 같은 작가들과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최근에는 여성 정치인 시몬느 베이유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프랑스의 미디어들은 바탕데르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하고 있다. 르몽드 지는 그를 가리켜 ‘투사'(l’homme de combat)라고 부르며, 사형제 폐지, 동성애자를 위한 권리 투쟁, 수감자들의 인권 개선, 보호감호제도 폐지를 그의 업적으로 꼽았다. 다른 미디어들은 그를 가리켜 ‘정의의 사람'(ㅣ’homme de la justice)라고 부른다. 그가 이룬 것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가 인류의 진보와 프랑스 정신에 이바지한 사람이라는 데에 프랑스 국민들은 대체로 수긍하는 것 같다. 판테온에 묻히는 것은 국민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영웅은 언제나 논란 속에서 일하고 나중에 탄생한다.
1981년 9월 17일 국회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그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이 연설은 인간 존엄성을 확인하는 역사적 연설로 기억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이었던 바탕데르는 당시 대통령인 미테랑을 설득했고, 국회에서는 반대파이자 다수당인 우파정당의 협조를 이끌어내었다. 당시 우파의 리더는 자크 시락이었다. 사형제는 폐지되었고, 2007년에 자크 시락 대통령 때에 사형제 폐지를 헌법에 수록하였다.
사형제 폐지에 대해서는 81년 당시에도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가 많아진 요즘에는 사형제를 부활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제도를 되살리는 논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바탕데르의 확고한 신념에 기초한 사형제 폐지는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다.
젊은 변호사였던 바탕데르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그가 변호하던 사형수가 전혀 남을 죽인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형에 처해졌고, 그의 무고함은 죽은 이후에 밝혀졌다. 바탕데르는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단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신념은 사실 그의 불행한 가족사를 통해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바탕데르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에 그의 부모는 어린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집을 벗어나 시골로 숨어 들었다. 위조된 신분증을 가지고 학교를 다니던 소년 바탕데르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아버지가 독일군 비밀경찰인 게쉬타포에 체포된 것을 알았다. 그 역시 게쉬타포에 발각되었지만 가짜 신분증을 보여주고 가까스로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전쟁 후 어머니와 파리로 돌아가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수용소에서 죽어 돌아올 수 없었다. 아버지 뿐 아니라 그의 할머니와 많은 친척들이 나치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아버지는 죽고 자기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
2차 대전 때에 행해진 유대인 대학살을 두고 유대인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죽일 수 있는가.” 죽은 사람의 숫자도 놀랍지만, 불쌍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거나 동조했던 그 많은 독일 국민들, 그리고 대량학살을 면밀하게 주도한 사람들. 그 모든 일에 대한 놀라움과 분노가 인간성 자체에 대한 의구심으로 표출된 절규이다.
바탕데르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 인종을 말살하겠다는 대량학살의 비극은 원시인들에 의해 저질저린 것이 아니다. 칸트와 헤겔을 낳고, 바흐와 베토벤을 낳은 문화국가 독일 국민들이 저지른 일이다. 인간은 언제든 집단적으로 비이성적인 폭력의 소용돌이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야만적인 폭력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가진 바탕데르가 장성한 후에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 때 참혹한 죽음을 당한 유대인들의 후손이 이룬 나라인 이스라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에 따라, 다시 말해서 철저한 응징과 복수의 원칙에 따라 팔레스타인과 대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통해 복수심을 추스를 줄 아는 존재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복수의 악순환이 다시는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무고한 자들의 죽음에 대해 증오와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는 대신에 무고한 자의 죽음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게 속의 일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바탕데르는 단 한명도 무고한 자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배수진을 쳤다.법정을 통한 사형집행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인간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아무리 죄인이라도 인간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위험하다는 이유로 감호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무실이 있던 방돔 광장에 모여 반대시위를 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종교적 신념이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삶은 신성하다.”(la vie est sacre).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건드릴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삶을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며 신념일 뿐이다. 테러나 살인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의 가족들은 복수심에 치를 떨고, 살인자를 죽이는 것을 정의로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그리고 허무주의나 비관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역시 사형제 폐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인생은 어차피 그렇게 고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80년대에나 지금이나 사형제 부활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크다.
그러나 그래서 바탕데르는 사형제 폐지를 통해 인간의 삶이 신성하다는 것을 모두가 확인하고 신념을 확고하게 하자고 말한다. 그는 사형제 폐지가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것으로서, 기독교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형제가 폐지된 지 몇년 후인 1984년에 나치의 지도자가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르랑스로 압송되었다. 그는 게쉬타포의 일원으로서 리용의 학살자로 불린 자였다. 비시 정권 시가에 수많은 프랑스 유대인들을 잡아서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바탕데르는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가 죽게 한 당사지임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을 절제하기 위해 그 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반인도적 범죄 행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재판 절차를 진두지휘했다. 수많은 증언이 쏟아졌고, 재판절차를 따라 4년간의 재판이 끝난 후에 리옹의 학살자는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사형제 폐지에 따른 혜택을 나치 전범이 누리게 된 것이다. 그의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그가 받은 대우는 너무나 격조가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바탕데르와 프랑스 국민들은 죽어마땅한 자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신념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리옹의 학살자는 수감된지 몇 년후에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바탕데르는 언제나 기독교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말한다. 유대인인 바탕데르가 기독교 정신을 말한 것은 매우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프랑스라는 나라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프랑스 혁명 자체가 기독교 정신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이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와 칼뱅의 직접적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20세기의 정치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근거가 된 사회계약설이 루터의 신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탕데르는 프랑스 혁명과 기독교 정신을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인간 존엄성(dignity)이란 말도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 사용한 용어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의 존엄을 확인하고 인간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신념의 종교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건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프랑스라고 하지 않고 그냥 ‘공화국'(La Republique)이라고 부른다. 대통령 마크롱이 등장하면, 아나운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입니다.'(Le president de la Republique)라고 외친다. 공화국이란 말은 오래된 봉건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민사회를 세웠다는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말인 것이다.
몇 년전 노란조끼 운동이나 작년의 연금개혁 반대 운동 때에 샹제리제 거리를 불태운 군중의 봉기를 보면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현대에도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민중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국민 여론이 꼭 옳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 운동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빅톨 위고는 말했다. “군중은 종종 국민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파괴적으로만 보이는 그들의 행동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것은 역시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근대 사회의 문을 열었던 혁명의 정신이 여전히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바탕데르 역시 자신의 과업이 프랑스 혁명 정신을 잇는 것이라 여겼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가 단순히 인권신장을 이룬 국가가 아니라, 인류 최초로 인권을 선언한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혁명 당시의 사상가 콩도르세(Condorcet)에 대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인간 존엄성에 기초한 자유의 권리, 평등의 권리, 그리고 남을 해치지 않는 한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정신.

장례식은 방돔 광장에서 치러졌다. 방돔 광장은 바탕데르가 법무관장관으로 있던 시절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높은 기둥 위에 나폴레옹 동상이 서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인들에게 나폴레옹은 정복자이기 이전에 봉건적 유럽사회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전파한 자로 기억된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유럽 침공 이후에 유럽의 질서는 근대 시민사회로 바뀌었다. 헤겔이 나폴레옹을 칭송하고 베토벤이 영웅이란 음악을 작곡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방돔 광장에 프랑스 애국가가 힘차게 울려퍼졌다. 애국가 역시 프랑스 혁명 때에 혁명군이 부르던 노래이다. 대통령은 바탕데르의 업적을 기억하며 그를 기리는 연설을 했다. 바탕데르가 인류의 진보와 프랑스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이다. 연설문의 내용은 매우 철학적이고, 연설의 음성은 강약을 바꿔가며 마치 연극배우의 운율있는 대사를 듣는 것 같았다.
젊은 대통령 마크롱은 사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의 제자요, 폴 리쾨르는 그의 마지막 저술인 <기억, 역사, 망각>이라는 역사 철학 책이 출판되기 전 원고를 읽고 조언을 한 마크롱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마크롱의 정치에는 보편 가치에 대한 철학적 신념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프랑스 만세, 공화국 만세”라는 말로 추도사를 마쳤다. 대통령의 추도사가 끝난 후 운집한 시민들이 한참동안 박수를 보낸다. 장례식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인간 존엄성을 확인하고 제도적으로 확립해나가는 노력에 대한 공감과 동참의 박수로 보인다.
시민들은 바탕데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확보하려고 애쓴 개인의 존엄성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보편가치입니다.” 한 국가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은 보편 가치이다. 보편 가치에 의한 결속력은 공동체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보편 가치를 추구하는 국가의 발전은 세계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이바지 한다. 그 나라가 잘 되는 것이 모든 나라가 잘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중심 가치는 무엇일까?
사진 1. 파리 판테온 정문(2016) 2. 판테온에 있는 디드로(Didrot) 기념묘(2016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