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이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니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 27:46)

하나님을 믿던 한 사람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하나님을 원망하며 절규하는 소리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죽은 그 분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그날 골고다 언덕을 뒤흔든 절규는 우주적 차원에서 벌어진 하나님 사건이다. 창조라는 하나님 사건이 구원이라는 하나님 사건으로 이어진다. 성부 하나님을 향한 성자 하나님의 절규.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을 받음, 그것은 목자 잃은 양처럼 버림받은 인류를 끌어안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분열이 아닐까.

가장 고독한 가운데, 버림받은 그 사람. 그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무한 거리가 생겼다. 전능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낯선 자기를 겪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신학대전>에서 말했다. “성자는 성부에게 낯설다.” 전능한 힘을 보이지 않고, 버림받은 자처럼 무능하게 죽어가는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생긴 그 거리가 우주만한 품이 되었다. 세상의 고통을 끌어 안아 자신의 고통으로 삼는 하나님의 품이 열렸다. 수난받은 하나님. 세상이 그 품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며, 거기서 생긴 품으로 죄 많은 세상을 품는다. 무지하면서도 가엾은 뭇 인생들이 모두 그 품으로 들어간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우주적 품이다. 한 사람도 남김 없이, 한 생명도 남김 없이 그 품에 안긴다.

우주는 하나님의 품이다. 태초에 생긴 우주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생긴 거리요, 하나님의 품이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태초의 사건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품이 있었다. 하나님의 고통으로 생긴 그 품 안에 고통받는 우주만물이 안겨 있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 그들의 고통을 십자가의 하나님이 품었다.

어찌 십자가의 하나님이 절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피흘리며 죽어간다.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피눈물을 이 세상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세상이 모두 눈을 뜨고 있는 가운데에 지금도 가자 지구에서는 연약한 사람들이 죽음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그들의 한 맺힌 절규를 세상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그 슬픔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님의 분열, 그것이 십자가의 절규이다.

어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과 몇 십년 전에 인류는 육백만 명의 유대인이 멀쩡한 인간들의 잔인한 폭력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유대인 수용소에 처음으로 진입한 연합군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 잡혀 온 이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들, 신발들, 안경들. 살아 남아 해골처럼 서서 쳐다보는 사람들. 영양실조로 기어다니는 사람들.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

어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의 청년들은 높은 집값에 꿈을 잃고 절망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결혼도 포기했다. 정직한 노동 대신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를 통해 어떻게든 낙오자의 신세를 만회하려 한다. 젊은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분노를 한국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그러라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게 아닌데. 사람이 살만한 행복한 세상에 대한 꿈은 잃어버렸으니, 어찌 이 세상에 아이들이 태어나려고 하겠는가.

어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정치인들은 증오와 분열의 언사를 일삼고 있으니 말이다. 선거가 있을 때면 상대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증오의 언사는 더욱 거세진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정권을 차지하겠다고 그런다. 이제 그만들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입을 다물라. 비방해야 표가 더 나온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은 정치공학적으로 네거티브를 중요한 전략으로 삼는다. 군중은 정치인들의 말을 따라 증오심을 뿜어내며 애국자가 된 듯 미워하고 상대의 인격을 살해한다. 가인의 후예들.

어찌 하나님이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증오는 아우슈비츠다. 나치의 증오의 정치가 아우슈비츠를 만들었다. 증오가 그럴듯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옷을 입고, 마치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양 증오심을 부추긴다. 증오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원인이고 대량학살로 가는 길이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여인들이 뒤따라 가며 울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식들을 위해 울라.”( 누가 23:28) 죄없는 자를 십자가에 달아 피를 보고 싶어하는 세상의 증오심, 그 증오심은 결국 서로를 물어뜯고 공격하고 죽이는 분열과 대량학살의 전쟁을 몰고 올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과 너희 자식들이 걱정된다. 이건 내가 너희에게 던지는 절실한 말이다. 증오는 아우슈비츠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너희가 재앙을 자초하고 있으니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식들을 위해 울어라.

 

어찌 하나님이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을 말하고 화해와 회개의 영을 일으켜야 할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이대며 군중의 탐심과 증오심에 거름을 주어 키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무슨 명목으로 교회에서 남을 욕하고 저주하여 세상의 증오심을 키우는가?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사탄의 도구가 되게 만들었을까. 왜 교회는 적그리스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너희 앞에 생명과 번영의 길이 있고, 또한 죽음과 파괴의 길이 있다. 살 길을 택하기 바란다”(신명기 30:15-17) 하나님의 바람이다. 그런데, 다같이 살 길을 찾지 않고 다 같이 죽을 길을 찾는다. 어찌 하나님이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이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존엄성을 잃고 소리 없이 조용히 신음하고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학원을 다녀야 하고, 의사와 변호사를 만들겠다는 부모의 손에 잡혀서 자기 학대를 강요당하고 있다. 부모들은 한달에 수백만원 씩 돈을 들여 자식 교육시킨다고 허덕이고 있다.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속에서 아이도 버림받았고 부모들도 버림받았다. 예수께서 세상을 보며 목자없는 양처럼 측은하게 여겼듯이, 한국의 어린이와 부모가 목자 없는 양처럼 갈 길을 잃은 채 버림받았다.

어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절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가 이제는 자기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아픈 몸 때문에 위엄을 잃고, 세대의 문화적 차이가 커서 자식들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오직 홀로 자신의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노인들의 고통스런 말년. 병원의 그 많은 환자들. 신체와 영혼의 아픔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이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삼으시는 십자가의 하나님의 절규가 어찌 이 땅에서 떠나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이다.

인간의 증오가 아우슈비츠라면, 십자가의 하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십자가 위의 하나님의 수난은 하나님의 승리이다. 피조물에 대한 무한책임으로 하나님이 겹겹이 쌓인 세상의 슬픔을 품으시고,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인생들의 고통을 하나님이 끌어안으셨기 때문이다. 증오심이 가져올 죽임과 멸망의 힘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잠잠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 인간은 증오심에 굴복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증오심도 품어 이기신다. 하나님의 버림받음으로 십자가에서 사탄이 이긴 것 같았다. 세상을 증오심으로 불타게 만들려고 하는 사탄은 십자가의 절규를 보고 좋아했지만,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승리 앞에 권세를 잃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는 것 같으면서 이긴다.

하나님이 세상의 고통을 품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게 부활의 아침은 신선한 공기로 세상을 채우고, 좌절에서 깨어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승리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증오의 세상 속에서 생명의 길이 열렸다. 물질주의 세상 속에서 영의 길이 열렸다. 새로운 인류 정신의 길이 열렸다. 정신이 물질을 이길 것이다. 정신은 언제나 지는 것 같으면서 이긴다. 그 승리는 모두를 이롭게 하는 승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겼다. 하나님의 승리 속에서 세상은 이미 용서받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살았던 과거뿐 아니라 앞으로 살 미래도 이미 용서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궁극적 언어는 찬양이다. 찬양의 비밀을 간직한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 땅의 증오심을 이길 것이다. 증오를 쏟아내는 입들은 막힐 것이고, 회개와 치유와 화해의 언어가 힘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이 물질을 이길 것이다. 봄이 오듯이.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은 진리이다. 구원의 진리이다.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땅의 모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인류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위해서. 또한 하늘과 바람과 땅을 위해서.

사진. 1. 십자가의 그리스도. 12세기 작품 2. 피에타. 1457년 아비뇽. (2016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