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신앙 여부를 떠나서 성서 속의 이야기들이 매우 재밌고 흥미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 같기도 하고 전설 같기도 한 얘기들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잠자리에서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처럼 아이들에게 성서 얘기만 들려주어도 흥미진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서에는 인간사의 굴곡에 대한 리얼리즘이 있고, 비극 속의 희망과 반전이 있다. 성서를 읽으며 성서 내의 심오한 속뜻을 인류의 정신사와 연관지어 묵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성서에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하나의 문학으로 보더라도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끼곤 한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분석하여 문학 평론으로 쓰더라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거의 매일 아침 성서는 감동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준다. <사무엘 상>에 나오는 사울의 이야기 역시 매우 긴박감 넘치고 수많은 반전이 펼쳐지는 대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 상 15장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얘기들이 펼쳐져 있다. 성서의 정치철학과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와 종교관 등이 들어 있다.
1. 사울은 사사 사무엘이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사람이다. 왕 없이 사사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꾸려가던 이스라엘이 왕정 체제로 넘어가게 되면서 세워진 첫번째 왕이 사울이다. 말하자면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처럼 국가라고 하는 정치 공동체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왕이 생겼다는 것은 권력의 소유자가 생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말렉 족속을 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무엘을 통해 내린 하나님의 명령은 아말렉 땅의 모든 것을 남겨두지 말고 진멸하라는 것이었다.
2. 성서에 이민족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종종 나오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보면 안 된다. 오히려 거꾸로다. 전쟁의 신을 섬기는 민족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든 새로운 평화공동체가 정착할 곳을 마련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민족 정복의 명령으로 표현됟 것이다. 진멸의 명령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는 시기에 집중된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진멸의 명령은 배타적이거나 패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정신이 뿌리내릴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비유적 언어이다.
인간은 우상을 숭배한다. 정복의 힘에 열광하고, 절대권력을 경배하고, 남을 이기고 부릴 수 있는 물질과 부를 숭배한다. 거기서 비롯된 인간 세상의 폭력과 죄를 지적하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진정한 평화의 공동체를 세우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이방신 숭배 금지의 명령은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주변민족들에게 물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새로운 평화의 방식을 뿌리내리려는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이민족을 진멸하라는 명령도 그런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모압의 그노스 신, 블레셋의 바알과 아스다롯, 바빌로니아의 마르둑, 그리고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신들이 모두 전쟁의 신이요,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의 신들이다. 성서에서 이스라엘은 주변의 패권주의 국가들 틈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 없이 세상을 평화로 인도할 소명을 가진 공동체이다. 그 독특한 소명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이고, 그 점에서 이스라엘은 세상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 선택을 받았다. 세상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살도록 지정된 공동체가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인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이끄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3. 사울은 이방민족 점령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에도 소를 몰며 밭을 갈았던 사울이, 이제는 어엿한 지도자가 되어 군대를 몰고가 전쟁에서 이기고 아말렉 왕 아각을 잡아왔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의 눈 밖에 났다. 성서의 하나님이 전쟁의 신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울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사인 사무엘은 전쟁 영웅인 사울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라.”(사무엘상 15:11)
문제는 사울이 살진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돌아왔다는데에 있었다. 아말렉 족속의 성 안에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진멸하라는 신의 명령을 사울이 어겼다. 그는 소와 양 중에 좋은 것을 골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사울도 할 말이 있다. 사무엘의 꾸짖음에 대해 사울은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짐승들)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려 하여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15) 양과 소를 살려둔 것은 사울이 아니라 전쟁에 참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좋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려고 했다. 사울은 그들의 생각을 좋게 보고, 아말렉의 가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번제와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지 않습니까?”(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 나온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사울은 권력의 정통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다윗이 부상하게 된다.
그런데 사울의 마음 역시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않은가. 전리품 중에서 최상품을 골라 하나님의 전에 바치려고 한 것을 그렇게 큰 죄로 보는 것은 다른 문화와 섞이지 않으려는 일종의 순결주의요, 지나친 배타주의가 아닌가.
4. 그러나 자연선택의 산물인 자연종교는 새로운 계시의 종교로 철저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전쟁없는 세상이 열릴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연종교의 신과 명확히 구분된다. 종교학적으로는 신성(the Sacred)과 거룩함(the Holy)의 차이이다. 자연종교의 신은 희생양의 피로 신성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보다 순종을 원한다. 사무엘상 15장에서 말하는 순종이란 희생양의 피를 요구하는 이방민족의 자연종교와 철저하게 단절하라는 것이다. 점치고, 굿하고, 일월성신에 절하는 것을 성서가 철저하게 금한 것 역시 자연종교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사울은 결과적으로 옛 종교에 머물렀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반역이란 말은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거스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오랫동안 인간사회는 반역을 제일 큰 죄로 생각했다. 질서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무질서의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에서 말하는 반역의 핵심은 사람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데 있다. 성서에서 금하는 반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종교적 사건이다. 사울은 옛 종교에 머무름으로써 불신앙의 대표가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분노를 산 이유이다.
5. 본문에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다. 사울이 반역하게 된 것은 그가 백성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다(15:15). 사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말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라.”(15:24) 이 문제는 성서의 정치철학과 관련이 있다.
정치는 언제나 백성의 소리를 중시한다. 이른바 여론이라는 것이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추구하는 현대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고대 중국의 맹자도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고 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 역시 국민의 의사를 법질서의 근간으로 중시했다.
그러나 성서는 다르다. 백성의 소리와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성서의 일관된 주장이다. 물론 백성의 소리를 듣지 않고 통치자 마음대로 행하는 정치는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 통치자를 독재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민의 소리가 진리는 아니다. “은혜와 진리”(사무엘하 2:6)이신 하나님의 뜻은 국민의 뜻과 다를 수 있다. 구약성서는 도처에서 그 점을 말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키케로를 비판하며, 국민과 대중을 구분했다. 키케로가 말하는 이성적인 국민은 알고보면 대중의 모습으로 서로를 따라하며 한마음으로 헛된 것을 추구하여 탐심과 지배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 국민의 소리는 중요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집단임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가는 국민의 소리를 따를 수 밖에 없지만, 늘 깨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여론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음을 늘 알려야 한다. 그래서 성서에는 언제나 왕권을 견제하는 예언자나 제사장이 있고,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는 세상나라 곧 국가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정치인과 국민의 합작품인 국가와 다름을 말해왔던 것이다.
사울은 백성의 생각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라.”(15:24)고 할 때에 사울의 마음은 비통했을 것이다. 국민을 두려워해서 그들의 말을 따른 것이 그토록 큰 죄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 분문은 인간세계에 대한 경고이다. 군중의 힘을 입고 권력을 쥐게 된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을 들먹이며 진실과 진리를 왜곡하고, 많은 국민이 그런 정치인들을 편들거나 열광하며 결국은 서로 나뉘어 진실공방을 벌이고 아귀다툼을 하는 인간세상 말이다. 그 점에서 성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와 맹자의 정치사상과 다른 독특한 정치철학을 제시한다.
6. 본문에는 교만에 대한 경고가 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는 말이다. “반역은 점치는 죄와 같고 교만은 우상숭배와 같다.”(15:23)
사울은 정말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죄를 지었다.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긴 것도 반역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좋은 것을 하나남에게 드리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사울이 범한 정말 중요한 반역행위가 있다. 그것은 전쟁에서 이긴 후에 자기를 높이는 기념비를 세운 일이다(15:12).
성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높일 것을 요구한다. 사람은 자기를 높이고 싶어한다. 사울의 얘기는 남 얘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얘기이다. 공을 세우고 그것이 기념되도록 만들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러는 순간 성서는 그것을 교만으로 보고, 우상숭배로 본다. 사람이 자신을 높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사실 그렇다. 자기를 높이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울이 자기 공적을 기린 행위를 가리켜 성서는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같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기를 높이는 데서 생기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발생하는 겸허함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자의 존엄함.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낮은 자의 존엄함.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존엄성을 회복하길 바란다. 인간 존엄성을 위해 성서는 인간이 자기를 높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높이도록 이끈다.
사울의 기념비를 비판하는 성서는 어떤 사람도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성서적 인간관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울은 공적비를 통해 권력자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이 왕의 출현을 싫어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배자가 없는 신앙공동체로 남기를 바랬지만, 현실적 필요 때문에 국가라고 하는 정치공동체의 탄생을 허락한 것이다. 정치에는 권력자가 탄생하기 마련이고, 그들은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성서는 그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7. 성서는 승리 기념비 자체를 싫어한다. 그것은 남을 침공하거나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는 전쟁영웅의 기념비를 세운다. 파리를 가도, 런던을 가도, 비인을 가도, 워싱턴을 가도, 그리고 서울 광화문 광장에 가도 전쟁 영웅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영웅들은 조국을 외침에서 구해낸 애국자로 칭송된다. 그것은 국가 공동체의 당연한 현상이다. 사울이 전쟁 승리의 기념비를 세운 것도 다른 민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자연스런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 점에서 성서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다르고 민족주의와도 다르다.
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주의도 모르고 유대인 민족주의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지극히 자은 자 곧 사람 하나하나의 구원에 있다.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본질은 정치공동체로서의 민족이나 국가에 있지 않고, 세상의 모든 지극히 작은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신앙공동체에 있다.
성서는 전젱 승리 기념비를 원하지 않는다. 잔쟁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수많은 이들의 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전쟁을 피할 능력이 없고, 그래서 전쟁에 대비해야 하며, 전쟁이 나면 승리할 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너무 쉽게 입에 담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한 민족이나 인류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결국 서로 싸우서 망할 것이요, 전쟁 때문에 망할 것이다. 복음서 속의 묵시록이 전하는 바도 그러하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비를 세운 사울의 행위를 비판하는 사무엘상 15장의 얘기는 인류의 전쟁충동에 대한 경고이며, 오늘날 힘의 대결과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사진: 영국 중세도시 요크의 교회에 새겨진 왕의 초상(2006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