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때에 초등학교를 다니셨고, 한국전쟁 때에 어린 학생 신분으로 국군과 경찰을 도와 빨치산과 투쟁하시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다. 광주사범 학교를 졸업하시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부산에 피난 와 있던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셨다. 신학대학에서 만난 장기천은 선생님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내게 두 분의 스승이 계시는데, 선한용 교수님과 장기천 목사님이다.
선생님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에 평생을 바치셨으며, 번역본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은 국내 번역본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원문에 충실하고 학문적 내용을 잘 살린 번역이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뛰어난 한글 실력이 수사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려한 문장을 잘 살린 것 같다. 내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선생님이 스트라스부르로 찾아오셨는데, 그때에 고백록을 번역 중이라고 하셨다. 거의 10년의 공을 들인 번역서이다.
1960년대에 선생님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선생님은 토마스 아퀴나스 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당시만 해도 대학에 아시아 사람이 적어서 선생님은 캠퍼스 내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곳 학생들은 신부나 수녀들이 많았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름을 물었다. 선생님은 답했다. “My name is 형님.” 신부들은 모두 선생님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의 유머 감각은 뛰어났다. 설교를 하실 때에도 유머를 넣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한 두 번은 배꼽잡고 웃게 만든다. 그 많은 유머들이 귀하게 여겨져, 유머집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많이 정리해 두셨다고 했으니, 아마 선생님이 쓰시던 컴퓨터에 들어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은 시카고 부근(아마, Coal City)에서 미국인 교회의 담임목사를 하셨는데, 60년대에 아시아인이 미국교회의 담임을 맡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선생님의 영어실력과 신학적 깊이 그리고 인품을 인정받았던 것 같다.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일시 귀국하셨다. 고향이 나주 봉황면이고, 형제들이 광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 상황을 둘러보신 후에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선생님은, 이듬해에 감리교 신학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셨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들은 미국 교인들은 모두 만류했다고 한다. 그들은 정말 담임목사를 좋아했고, 교인들과 담임목사가 끈끈한 우정으로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연대감으로 교인들은 하나가 되어 교회도 건축했다. 교인 중에 선생님을 사랑해서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던 미국여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가끔 그 에피소드를 얘기 하셨다. 그렇다고 독신생활에 대한 선생님의 신념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 같다.
목회에서 흘러나온 유머 하나. 교인 중에 아흔이 넘도록 잘 사는 부부가 있었다. 선생님이 짖궂게 물었다. “살면서 이혼하고 싶은 적은 없었습니까?” 부부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이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여러 번 했습니다.” 독신으로 사신 선생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전하는 유머에 나 역시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머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던 삶의 진실에 대해 정곡을 찌르되, 그 찌름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는 데서 생겨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유머는 기독교적이다. 동이시아의 해학과 서양의 유머는 좀 다른데, 유머가 기독교 문화권에서 발전한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지만, 삶에 대한 원초적 긍정을 잃지 않고, 고통을 자초하는 죄 짓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는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칩니다.”(로마서)라는 성서의 말씀이 그 점을 잘 대변한다.
15년 전 쯤에 동두천에 간 적이 있었다. 가끔 선생님 모시고 드라이브를 했었는데, 그 날은 동두천 미군부대에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이 한국 전쟁 직후에 군목으로 일하던 곳이다. 50여년이 지났는데도 건물이 여전히 깨끗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셨다.
어느 주일날 예배가 끝난 후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웃으며 선생님께 물었다. “선 목사님, 오늘 몇 사람이나 구원했습니까?” 선생님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는데, 곧 입에서 이런 답이 나왔다. “나는 설교하고,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I preach, God counts) 선생님의 재치 있고 신앙적인 대답에 거기에 모인 미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박수치며 감탄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순간적 재치와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이 잘 드러난 장면인 것 같다.
선생님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치열하게 겪은 분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은 동맹휴학을 주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5학년. 일본인 여교사가 부당하게 조선 아이들을 때리자, 선생님은 항의의 표시로 다음날 학교에 가지 않기로 몇몇 친구들과 약속했다. 그 사실이 학생들에게 전파되어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고, 선생님은 학교 뒷산에 올라 사태를 살폈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 졌고, 아이들은 약속대로 며칠 뒤에 다시 등교했다. 그날 일본인 교장이 일본도를 차고 교실에 들이닥쳤다. 그는 칼을 빼어들고 주동자 색출작업에 나셨다. 결국 주동자가 밝혀졌고, 선생님은 심하게 맞은 후에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선생님은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해방된 대한민국의 분단은 선생님께 큰 상처를 안겼다. 선생님의 고향인 나주군 봉황면은 빨치산이 드나들던 곳. 낮에는 국군이 들어오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산에서 내려와 동네로 들어왔다. 선생님의 형님은 광주의 성서학교를 졸업한 전도사였지만, 독립 운동을 한 장인이 좌익이었다. 영광군 백수면은 좌익이 치리하던 곳이고 형님 가족은 그곳의 지도부였다. 당시 학생이었던 선생님은 라디오를 만들어 전황을 청취하고 다양한정보를 경찰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집안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뉜 것이다.
선생님 동네를 점령한 빨치산들이 선생님을 잡으려고 했을 때에 선생님은 형님 댁을 은신처로 삼으려고 먼 길을 뛰어 급하게 피신했으나, 형님과 형수님이 자신들의 안전을 염려해 받아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절망감을 안고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그때에 거기서 경찰과 국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 300 여 명이 처형된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나중에 국군이 그 마을에 들어왔을 때에는 빨치산에 협조한 주민 300여명이 국군에 의해 살해 되었다. 당시 국군과 경찰에게 협조한 선생님은 형님 가족의 안전을 요구했고, 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조카들을 업고 30리 길을 뛰어 마을을 벗어나 그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형님 부부도 무사히 마을을 탈출할 수 있었다.
10여 년 전에 선생님을 모시고 호남신대 노영상 총장의 차를 타고 함께 선생님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성지순례라고 불렀다. 그때에 그 마을에서 살해된 주민들을 기억하는 추모비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 형님은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선생님이 등에 업고 뛴 조카들은 여든이 넘은 나이로 지금도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선생님은 평생 독신으로 사셨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이유를 알고 싶어 했는데, 어느날 밤에 감신대 벤치에 앉아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냇가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그 많은 주민들의 시신. 그리고 죽은 엄마 옆에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 가족 내에서도 좌익과 우익이 갈려서 의심하고 서로를 멀리하는 슬픈 현실. 가족이 겪는 비극을 목도한 선생님은 독신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당시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기막힌 이야기들이 많다. 빨치산으로부터 선생님을 자기 집 다락방에 숨겨 준 친구의 부모님과 여동생들이 빨치산에게 잡혀 산으로 끌려가 겪은 고초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친구 아버님은 그 때의 충격으로 돌아가셨고, 여동생들은 트라우마로 평생 시달리다가, 그 중 한 분이 10여 년 전에 서울에서 일흔도 넘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기 때문에 생긴 한 집안의 비극적 결말을 전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고통이 배어 있었다.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선생님의 유머는 슬픔을 딛고 살려는 선생님의 개인적인 생존방식이면서, 삶의 비참함이라는 진흙 속에서 삶에 대한 근본적 긍정이라는 꽃을 피워내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평생 아우구스티누스를 가르쳤지만, 평생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한 학생이기도 했다. 늘 아우구스티누스 책을 머리맡에 두고 읽으셨다. 선생님과 만나 식사하고 산책할 때에 주제는 언제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늘 들을 거리가 있는 새로운 얘기였다. 왜 폭을 넓히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만 가르치실까? 한때 그런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에게 아우구스티누스를 배우고 석사논문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에 대해서 쓴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후 다양한 사상가를 공부해 보니, 서양의 신학과 철학은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 루터와 칼뱅은 물론이고, 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 불트만의 해석학과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 정치신학이 모두 아우구스티누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번에 『아우구스티누스 읽기』라는 책을 쓰면서, 폴 리쾨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책 『그리스도교 교양』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루터 신학에서 파생된 칸트와 헤겔은 말할 것도 없고, 키르케고어의 실존주의나 데카르트의 코기토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구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록』이나 『신국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후설 자신이 자신의 책에서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했기에 나는 서양 학자들의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선생님은 청렴하시고 설교를 철저하게 준비하는 점에서 나에게 목회자의 모델이었고, 깊이 있게 공부하는 점에서 나에게 학자로서의 모델이었다.
작년 10월에 내가 학술발표를 위해 경주에 내려가 있을 때에 선생님이 넘어지셔서 입원하셨다는 전갈이 왔다. 고관절 수술을 하신 후에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 올해 1월에 고향인 광주의 병원으로 옮기시고, 2024년 7월 13일 새벽에 돌아가셨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나와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신 적이 있다. “죽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야지.” 순간적으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거라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이 한국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답은 의외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해야지. 당신 덕분에 잘 먹고 살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가르쳐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솔직한 심정이 들어있는 파격적인 언사에 나는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유언대로 고향인 나주의 선산에 묻히셨다,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있어서 많이 걱정했다. 무엇보다도 하관 예배 때에 토사가 흘러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비에 대비해서 운동화를 신고 갔으며, 선생님 조카들은 나를 위해서 장화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고 참아 주면서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하관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선생님에게 들은 유머를 섞어 말씀을 전했다. 그것이 이 땅의 삶을 졸업하는 선생님의 길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의 세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 대화하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의 스승이 되어 주신 선생님,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대화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찬양하는 즐거움을 기대하겠습니다.
서잔: 1.고향 나주에서 2.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3. 빨치산을 피해 선생님이 숨어계시던 친구 집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