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과거에도 더운 날들이 있었으나 내가 여름에 태어나서 그런지 여름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대청에서 바람 쐬며 어머니가 내오신 수박, 참외나 미시가루를 맛있게 먹으며 여름을 났다. 작은 한옥이었지만 대청이 있어서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꽤 시원했다.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살림살이는 깔끔하고 풍요로웠다. 어머니는 삶의 의욕이 넘치는 분이요, 먹는 걸 좋아하시고 요리를 잘 하셔서 집에 간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때가 되면 절기음식을 만드셨고, 계절에 맞는 과일을 사먹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대청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부채 부치며 한숨 자는 것도 여름을 잘 나는 비법 중의 하나였다. 그래도 너무 더울 때에는 마당에서 등멱을 했다. 찬 물을 받아 내 등에 뿌려주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물이 열기를 단번에 씻어 내린다. 더위가 확 달아나게 하는 데에 최고다. 요즘 실내에서 하는 샤워하고는 좀 개념이 다른데, 느낌으로 보면 등멱 만큼 시원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많아야 서너 바가지의 물이면 충분한 것을 생각하면, 물 자원을 아끼고 좋은 효과를 얻는다는 점에서 소비적인 샤워보다 등멱이 훌륭하다.
대청과 산바람과 미시가루, 그리고 낮잠과 등멱.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소박한 피서인데,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방식인 셈이다. 이쯤 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홀로 있으면 거문고 뜯고 옛 서적을 읽다가, 사이사이 누워 하늘을 볼 뿐이다. 잡생각 들면 일어나 산길을 거닐뿐이다. 손님 오면 술 내오게 하여 시 읊을 뿐이다. 흥이 오르면 휘파람 불며 노래할 뿐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그뿐이다. 추위와 더위를 따라 옷 입으니, 그뿐이다. 해가 지면 집에서 쉬니, 그뿐이다. 비오는 아침과 눈 오는 저녁, 저녁 풍경과 새벽 별. 그윽하게 머물며 신비로운 취향을 누리니, 그 즐거움을 어찌 말로 전할 수 있으랴. 말한들 이해하지 못하리라.” (獨居則撫破琴閱古書, 而偃仰乎其間而已, 意到則出步山樊而已, 賓至則命酒焉諷詩焉而已, 興劇則歗也歌也而已, 飢則飯吾飯而已, 渴則飮吾井而已, 隨寒暑而衣吾衣而已, 日入則息吾廬而已. 其雨朝雪晝, 夕景曉月, 幽居神趣, 難可爲外人道也. 道之而人亦不解焉耳)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살았던 장혼이란 분의 글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을 많이 했으나 글 솜씨가 뛰어나서 세간의 인정을 받고 나중에는 중인신분으로 궁궐에서 문서를 교정하는 일까지 맡았다. 인왕산 옥류동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위의 문장에도 그곳의 아름다운 정경이 아른거린다.
이 분의 호가 이이엄(而已广)이다. ‘이이'(而已)는 ‘뿐이다’라는 뜻으로 문장 끝에 붙는 조사인데, 특이하게도 조사를 호로 사용했다. 독창적이고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뿐이라’는 말은 ‘그거면 됬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라는 뜻이다
‘엄’(广)은 집이라는 뜻인데, 헛간이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이이엄’이란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그뿐이다’라는 생각의 집에서 살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크고 화려한 집이 아니라, 작은 것에 만족하는 생각의 집이다. 그래서 집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 중에서도 특별히 ‘엄’(广)자를 쓰지 않았을까.
이 글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모두 자연이거나 삶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리적인 것이다. 아침의 비와 저녁의 눈, 저녁노을과 새벽별,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들을 보며 즐길 수 있다면 돈 들지 않는 풍요로움이 넘칠 것이다. 작가는 그런 즐거움을 가리켜 신취(神趣) 곧 신묘한 취미라고 했으니, 무상으로 얻는 선물이 아닐 수 없고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옷 입는 것은 생리적인 것이니, 그런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하나하나 만족을 느끼는 것 역시 소박한 풍요로움이 아닐 수 없다.
거문고 뜯고 책 읽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누리던 풍류였다. 고서(古書)를 읽는다고 했는데, 요즘처럼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가 아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마음을 맑게 만들어 삶의 활력을 얻는 일은 지혜의 문제이지 지식이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삶의 지혜는 2500년 전에 나온 동서양의 고전들에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찾고 공자왈 맹자왈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거문고 뜯고 고서를 읽는다는 것은 지식의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이엄이란 호는 얼마나 멋진가. 200년 전의 장헌 이이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듯 하다. “그러면 됬다, 그러면 됬지 뭐 더 바랄 게 있는가. 그러면 충분하지 꼭 남들 따라 이것저것 다 해야 하나?” 요즘처럼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고 가라앉을 조짐을 보이지 않을 때면 장헌의 문장을 떠올리며 열기를 식혀본다.
그림, 김기창 화백의 청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