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의 광복절에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그렇잖아도 뜨거운 날씨에 그 일 때문에 열기가 더해진 것 같다. 독립기념관 관장이 새로이 임명된 사건이다. 이 분은 일제 강점기 때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말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 분의 주장대로라면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에 한국 사람은 일본인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주장과 일치하지만 한국인들의 인식과는 분명히 맞지 않는 내용이다. 일제 시대에도 한국인들은 독립의 의지에 불타 있었을 뿐,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을지언정, 자신의 나라를 일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매국노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를 겪은 부모님들로부터 자신의 나라가 일본이었다거나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조선에 활보했던 일본인들의 호칭은 늘 왜놈이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신들을 일본인과 전혀 다른 한국인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1910년 한일합병을 통해 법적으로 우리나라가 없어졌다면 한국인은 일본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술국치의 한일합병조약은 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본다. 그 점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한일회담에서도 확인했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이 모두 강압에 의한 것으로 무효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 정부의 일관된 주장이었고, 이번에 외무부도 그 점을 다시 확인했다. 광복회의 질문에 대해 현 정부의 외무장관 역시 한일합병조약은 원천 무효임을 확인한 것이다. 원천무효란 합병조약의 효과가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한국이 법적으로 일본의 일부가 된 적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에도 우리에게 나라는 있었고 다만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흔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거나 나라 없는 백성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정말 나라를 빼앗겨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요, 다만 일본의 억압 밑에서 나라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채 면면히 이어져 왔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만든 헌법 전문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주장해서 넣은 것인데, 거기에는 우리나라가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되어 있다.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등 그 이름은 달랐지만 우리나라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통일신라 이후 또는 최소한 고려 이후로부터 동일 문화와 민족적 연속성이 인정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다른 얘기들이 등장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이전의 고려나 조선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지금 독립관장은 기자회견에서 자기가 한 말을 뒤집으면서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다른 강연에서 그는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분명히 말하며, 1948년에 대한민국이 시작되었고, 그때를 광복절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에는, 지금의 한국인이 우리나라라고 여기는 것은 대한민국이어야 하며, 고려나 조선은 우리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다르다. 대한민국은 이미 1919년 임시정부에서 건립되었다. 1919년에 고종이 죽으면서 조선의 연장인 대한제국이 사라졌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1919년 삼일 만세 혁명으로 우리나라가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후에 결성된 상해 임시정부의 헌장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했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문화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립되었다고 본다. 1948년은 정부를 세운 날이요, 1919년 이래로 존재하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를 정식정부로 만든 날이다. 1948년 당시에도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라고 불렀으며, 건국일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에서 건국이라는 말을 세간에서 쓰기도 했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법적 용어가 아니라 정부를 세운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 점은 이승만 대통령도 1948년 첫 관보에서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명기한 것에서도 분명하다.
그런데 왜 1948년의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청문회에 임한 노동부 장관 후보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에게 나라는 없었으며 조선인은 당연히 일본 국적이라고 했다. 그런 주장은 같은 정부 내의 외무부의 견해와도 다르다. 그 사람은 우리가 한일합병조약을 무효라고 주장하더라도, 과거에 한국인이 모두 일본인 이름으로 창씨 개명하여 호적에 올린 사실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도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손기정 선수에게 일장기를 달게 했지만 그것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임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것일 뿐 손기정 선수를 일본인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김문수 씨의 발언은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더구나 그는 각료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한국정부의 공식견해인 무효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취소와 달리 무효는 처음부터 법적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1910년의 조약이 무효이면, 그 조약에 의거한 모든 법적 행위는 모두 무효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한일합병 조약의 의거해서 조선인을 일본천황의 신민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 이름 변경 등의 행위를 했더라도 처음부터 법적효력이 없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일본의 주장은 다르다. 일본정부는 해방 이후부터 과거 조약의 효력이 중지한다고 말한다. 1945년 해방되기 이전 곧 일제강점기 기간에 한국은 법적으로 일본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원래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협정에서부터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달랐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피해국들에게 전쟁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일본이 한국에 주는 돈을 일본측은 배상금이 아니라 해방 축하 및 발전지원금이라고 부르려 했다. 한국은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의 일부였으므로 전쟁 상대국에게 주는 배상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과 싸운 독립군과 광복군의 독립전쟁의 역사를 내세우고, 다른 나라를 불법으로 점거해서 식민지로 삼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 정부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agree to disagree). 각국의 정부는 각자의 견해를 자기 국민에게 전달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셈이다. 그것이 오랜 협상 끝에 박정희 정부에서 내린 한일회담의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이 1910년의 조약을 원천무효로 보고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여긴다는 점을 일본정부도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때에 한국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한국 정부 장관후보자의 주장은 일본인들이 듣기에도 매우 의외인 셈이다. 한국의 장관이 될 사람이 일본의 주장을 대변해 주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이 각자 자기에게 유리하게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정부에서 일할 사람이 민족의 과거사를 남의 일 말하듯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모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 사람이 한국정부의 내각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당시에 한국인이 일본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인처럼 되었고 이름도 일본인 이름으로 바꾸어 호적에 올린 게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원천무효인 한일합병 조약에 의거한 것으로서 법적 효과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은 여전히 한국인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00년 이후에 갑자기 한국인들의 일반적 정서 및 인식과 다른 주장을 하며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왜 한국인이 한국인의 인식과 정서에 맞지 않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해치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일제에 대항한 독립투쟁보다는 공산국가가 아닌 자유 민주국가를 세운 일을 더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일제강점기의 반일 운동보다는 해방 후의 반공운동을 중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역사가 자유 민주국가 건설의 토대를 이룬다. 그 점을 간과하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평가절하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일본 제국주의의 수많은 전쟁범죄와 만행을 덮어버리게 된다.
물론 이웃 일본과 잘 지낼 방법을 찾아야 하고 반일이 한 나라의 중심가치가 될 수 없지만,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노예로 만들고 자존감을 짓밟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며 반성하지 않는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 죄악을 그냥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독립투쟁과 자유민주국가의 건설은 모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전자가 후자의 토대를 이룬다. 독립투쟁을 하던 분들이 상해에서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알렸다. 일제의 강압 아래에서 자유와 자주를 간구하던 한민족의 정신이 자유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말로는 부인하면서도 사실상 독립운동의 역사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공동체의 정기를 흐리고 일신의 안일을 꾀하는 기회주의자들을 양산한다.
나는 조선의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의 사상에서 서구의 철학자들 못지않은 학문의 수준을 발견한다. 청년 시절에 유학할 때에도, 서양으로부터 배울 건 배우지만 우리나라 전통에도 좋은 게 많다는 신념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생각한 우리나라는 신라나 조선을 포함한다. 나는 지금도 경주의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상을 보고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미적 감각이 신라인들에게서 온 것임을 신비롭게 체험한다. 서울의 중앙박물관에 갈 때마다 고려청자를 보는데, 역시 그 빛깔과 문양에서 나는 한국적 미가 무엇인지 감탄하며 공감한다. 조선의 백자나 겸재의 그림에서도 고구려 신라 백제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풍류를 확인한다.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과도 달리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한국의 미가 있고, 한국인들이 즐겨하며 공감하는 멋과 맛이 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았던 조상들의 음식을 이어받아 밥상을 차리고, 조상들의 감각을 이어받아 그들의 문화유산에 공감하며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 광화문에 들어서면 푸른 하늘 밑 북악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근정전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고 조화로운가.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조선 건축물에 집약된 느낌을 받으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에 창덕궁의 인정문과 낙선재를 지나 천천히 걸어 언덕을 넘으면 주합루가 보이고 연못에 서 있는 부용루가 아름다운 단풍 속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한국인은 어려서부터 민족유산이 주는 멋과 맛 속에서 느끼고 생각을 형성하며 지내는 것 아니겠는가.
몽골 침략이나 임진왜란의 참상과 병자호란의 수치를 오늘날 우리의 일처럼 여기고 분개하고 반성하는 것 역시 과거에 이 땅에 살았던 조상들의 삶과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처럼 이전의 문화와 역사가 대한민국의 국민에게로 이어지는데, 고려나 조선이 민주국가가 아니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고려나 조선과 전혀 다른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국호가 다르더라도 나라는 하나로 이어져왔다. 삼국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나라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없어지고 한국인은 일본인이 되었었다는 주장은 면면히 이어져오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기독교 신학자이지만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아 삶을 이해하고 교통하며 살아가는 한국인이다. 이 땅에서 벌어진 고난과 투쟁과 사랑과 그리움의 역사를 담고 있는 한국어라는 창을 통해 하늘의 진리를 짚어가는 한국인 신학자이다. 신학자로서 한국에 갇히지 않고 인간 그 자체와 세계를 향하지만, 그러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빛깔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말하는 한국인 신학자이다.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부러워한 적이 없고,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다. 영어가 필요하긴 한데, 내가 꼭 영어를 잘 해야하나? 프랑스에서 유학했지만, 내가 모국어를 두고 꼭 불어를 잘 해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공부하고 책 쓸 때에도 늘 변치 않고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다. 아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이 땅에 대한 예의를 차리려고 그런 것 같다. 나는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울음소리와 노랫소리를 통해 인간을 보고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한다.
사진. 1. 화가 이상현의 작품. 1922년 일본에서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 부부가 인정전 앞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 조선왕궁의 정전 앞에서 조선왕족이 일본 제복을 입고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은 모습이 화가가 그려 넣은 조선의 화려한 복사꽃과 대조를 이루며 슬픔을 자아낸다. 2. 경주 봉덕사 신종의 비천상 (2023년 가을 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