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감격은 통곡으로 터져 나왔고, 일반 백성들은 기쁨에 환호했다. 감격의 통곡과 즐거움의 환호가 그날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때는 기원전 537년. 유대인들이 이른바 제 2성전의 기초를 놓았던 날의 이야기이다(에스라 3장).

구약성서는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무너진 솔로몬 성전 터에 다시 성전을 재건하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유다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다. 스룹바벨은 기원전 585년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왕 여호와긴의 손자로서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유다총독으로 임명된 인물이다.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시작한 성전 재건을 에스라가 완성했다. 그는 학자이면서 제사장이었다.

70년의 노예 생활을 끝내고 독립된 조국에서 그들은 우선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다. 성전의 기초를 놓던 날, 백성들이 모였다. 그 중의 대부분은 남의 나라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요, 적어도 75세가 넘은 사람들만이 옛 성전 곧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노인들은 포로로 끌려가던 때의 수모와 고난을 모두 기억하는 자들이다. 불타서 황폐하게 된 옛 땅 위에 다시 성전을 짓게 된 날, 그들은 감격해서 통곡했다. 솔론몬 성전을 보지 못하고 곧게 솟은 다윗 성의 기억도 없던 대부분의 백성들과는 또 다른 회한과 감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이 기쁨의 환호를 지를 때에 노인들은 감격과 회한의 울음을 터뜨렸다.

BC 535년이면 동아시아의 공자와 인도의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때와 같은 시기이다. 무엇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류를 전쟁과 재앙에서 구원할 것인가? 바야흐로 인류라는 종의 미래를 결정할 구원의 진리를 구하는 정신이 꿈틀대던 때이다. 성전 재건의 사건은 꿈틀대던 인류 정신의 대세가 어디로 기울지를 잘 보여준다.

성전 재건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국가를 재건하는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무에서 하늘의 진리가 온전히 역사한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을 불살라 성과 가옥을 철저하게 파괴했다(열왕기 25장).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 인간의 수고가 모두 무로 돌아간 곳. 그곳에 다시 성전이 건축된다. 바빌로니아 군대는 귀족과 기술자와 장인과 군인들을 모두 끌고 가고, 가난한 사람만 조금 남겨두어 포도원을 돌보게 했다. 예루살렘은 인재가 없는 곳이 되었다. BC 535년, 그 때는 일할 만한 인재가 없어 사람이 업적을 낼 수 없는 때이다.

인간의 수고가 무로 돌아간 폐허의 공간. 그리고 인재가 모두 사라져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때,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의 공간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시간. 무의 공간과 시간 위에 성전을 세운다. 솔로몬 성전처럼 크고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소박하고 작은 성전이다. 솔로몬의 풍요로운 물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 자들이 아픈 가슴과 낮아진 마음으로 짓는 성전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된다.

세상과 인간의 구원, 새로운 세상의 시작, 그것은 모두 무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인간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때에 온전한 진리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람이 약한 곳에 하나님이 강해진다(고린도전서)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사람이 언제든 새롭게 시작하고자 할 때에, 뒤엉킨 갈등과 무력감 속에서 길을 찾고자 할 때에, 그때에 인간을 구원할 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진리”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리를 내주어 무로 돌아가고, 은혜와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구원을 위한 큰 가르침들은 모두 무(無)를 말한다. 불교의 핵심 용어는 무이고, 무를 끝까지 밀고 나가 세상과 인생을 실체로 보지 않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무라는 글자를 잘 사용하지 않은 유교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비우고 하늘의 도가 주관하도록 함으로써 세상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11세기에 이르러 유학자 주희가 무극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는 도교와 불교의 무 자를 활용해서 자기 비움의 실천력을 높이고자 했다.

사마천은 자신의 책 『사기』에 아버지 사마담이 제자백가에 대해 평가한 말을 남겼다. 사마담은 유교보다 도교를 더 높이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무로 돌아가는 데에 도가가 더 쉽고 우수하다는 이유 때문인 것 같다. 큰 가르침들의 차이는 무에 이르는 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무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말이다.

사마담은 도가가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여 무형의 도에 일치하게 만든다”(道家使人精神專一, 動合無形)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가 역시 흐트러지지 않는 통일된 마음(主一無適)으로 천리와 하나가 되려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가.

사마담은 바로 그 부분에서 도가가 유가보다 낫다고 보는 것 같다. 그는 유가와 도가의 차이를 도가의 ‘무위’(無爲)라는 글자에서 찾는 것 같다. 무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가의 주장은 허무를 본으로 삼고, 사물의 순환에 따르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其術以虛無為本, 以因循為用). 만사에 대응하는 ‘나’를 세우기보다는 만사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르니, 이것이 무위의 의미이다. 결국 무위란 어떤 일을 주도하는 주체의 의식을 버리고, 우주자연의 도가 나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다. 무위는 진리 앞에서의 수동성을 가리킨다. 그 점에서 도가는 천인합일의 목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의지를 단련하는 유가와 다르다는 것이 사마담의 주장인 것 같다.

“굳셈과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총명함을 버린다.”(去健羨, 絀聰明)는 사마담의 설명은 무위의 수동성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총명은 지혜를 가리키는데, 유가는 인간의 갈등을 적절히 해결할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가는 지혜를 버리라고 한다. 성인의 정치를 추구한 유교에서 지혜는 특히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노자는 거꾸로 말한다. “성인이 되려하지 않고 지혜를 포기하면 백성의 이익은 백배가 되고, 인과 의를 버리면 백성은 효와 자비로 돌아가게 된다.”(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도덕경』, 제19장>

그것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의 의미이다. 분명한 목적을 정해 성취하려고 하거나, 그 성취를 위해 굳게 마음먹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덕을 쌓으려고 힘쓰지 말라. 아무 것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때에 맞추어 옮기고, 만물의 변화에 순응한다.”(與時遷移, 應物變化)는 말, 그리고 “사물에 앞서지 않고 사물에 뒤떨어지지도 않는다”(不為物先, 不為物後)는 말도 그런 의미이다. 뭔가 정해 놓은 목적 없이 그때그때 사물의 이치에 맞게 따르면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무위의 자유는 내가 하려고 하지 않고 사물의 도에 이끌려 행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물론 유가 역시 천리에 이끌려 행동하고자 했고, 그 점에서 퇴계 선생의 이발(理發)은 유교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도 도가가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 사마담의 주장이다. 사마담은 유가의 가르침은 실행하기 너무 어렵고, “노력에 비해 얻는 효과가 적다”(勞而少功)고 했다.

결국 사마담이 도교를 유교보다 낫게 본 것은, 사람이 하지 않고 진리가 주도하게 하는 데에 도가의 가르침이 더 효율적이라는데 있다.

BC 6세기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에는 노자의 무위와 다른 점이 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존재가 무에 앞선다. 진리인 하나님은 무라는 글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철학적 용어는 존재자체이다. 존재 자체인 하나님에게서 생겨난 세상의 존재는 엄연한 현실성을 지닌다. 기독교는 세상과 인생의 실체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책임적 주체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수동성은 인간을 책임적 주체로 만든다.

물론 사마담도 도가의 무위를 실천하면 ‘만물의 주인이 될 수 있다'(能為萬物主)고 말한다. 도 앞에서의 수동성이 결국 인간을 진정한 주체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주위환경과 사태에 끌려가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하며 삶을 주도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진리 앞에서의 절대 수동성이야 말로 인간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길임을 사마담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만드는 인간 주체성은 상황을 주도하는 주체일 뿐 아니라 책임적 주체이다. 세상의 고통과 악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는 주체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는 도가나 유교나 불교와도 차이를 보인다.

그처럼 성서의 종교인 기독교와 도가나 유교와의 차이를 볼 수 있지만, 도가나 유교 역시 진리 앞에서의 수동성이야말로 인간을 참된 주체로 만든다는 점을 자각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통하는 점이 있다. 그 점에서 도가나 유교는 성서의 의미를 보편적 정신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성전 재건은 유대교라는 한 종교의 복원 사업에 그치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인류의 정신사적 의미를 가진다. 폐허에서 시작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도가의 무위처럼 내가 아닌 진리가 주재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약한 곳에 하나님이 강해진다. 거기에 자유와 평화와 구원이 있다.

사진: 1.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 일명 통곡의 벽. 스룹바벨의 제 2성전을 헤롯대왕이 대대적으로 증축했는데, 로마제국의 침공과 파괴로 서쪽 벽만 남았다(2014년 촬영) 2. 가을이 깊어가는 산 속의 계곡(202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