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희망의 사건이다. 성서가 전하는 성탄절의 복음을 들어보자.

첫째. 사람이 뒤로 물러난 자리에 하나님이 오신다

마태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 성탄절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23)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날이다.

그런데, 그 분이 오신 것은 한밤중이다. ‘한 밤중’에 ‘성 밖의 들’에서 자고 있던 목자들에게 천군천사가 나타나 찬양하며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렸다(누가 2장).

한 밤중은 인간의 노동과 노력이 멈추었을 때를 말한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땀흘려 일하는 노동도 멈춘 시간이 한밤중이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낮에 있던 옷을 벗고 맨몸으로 돌아가 숨만 쉬며 안식한다. 한 밤중에 인간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가슴을 내밀며 서 있던 자세를 버리고, 바닥에 누워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한다. 자기주장을 위한 갖가지 인간언어가 잦아들고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한밤중이다.

그 한밤중에 하나님이 오신다. 사람이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고 생각을 멈춘 그 시간의 자리에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다.

한편 성탄절의 하나님은 들에서 자고 있던 목자들에게 소식을 알리셨다. 하늘에서 찬군천사가 나타나 목자들에게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양치는 목자들이 자고 있던 들은 성 바깥이며, 성 밖은 문명 바깥을 의미한다. 사람은 문명을 일구며 인류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높은 건물을 짓고 큰 부를 소유하며 남보다 우월한 지위를 뽐낸다. 인간은 남보다 우월한 자신의 지위와 소유에서 인생의 영광을 본다. 인간의 문명이 화려하게 발전한 것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남보다 나은 삶을 살려는 경쟁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명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는다.

문명이 뒤로 물러가고 인간의 뽐냄이 사라진 성 바깥, 빈 들판. 그 위에 천군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을 알렸다. 인간의 영광이 자기를 낮춘 그 들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빛을 비추었다.(누가 2:9) 성 안의 세상은 서로 영광을 받으려는 인간의 무대이지만, 성 밖의 들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천군천사의 찬양의 무대가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로다.”(누가 2:14)

희망의 근거는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이 좌절해서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난 그 자리로 하나님이 오신다. 인간이 슬픔으로 자신을 낮춘 그 자리로 하나님이 오신다. 인간이 나약해진 그곳으로 하나님이 오신다. 그것이 한밤중에 오셔서 들판의 목자에게 소식을 전해준 성탄절의 메시지이다.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의 마리아 교회는 전통을 자랑하는 개신교 루터 교회이다. 2차 대전 때에 영국공군의 갑작스런 보복 공습으로 드레스덴의 시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교회가 공습으로 무너질 때에 시민들은 목숨을 무릅쓰고 하나둘 교회 벽돌을 집어 집에 보관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집에 보관했던 벽돌을 들고 나와 교회를 재건했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우선 교회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문명을 일구고 다시 자신의 죄와 폭력으로 그 문명을 잿더미로 만드는 인간과 인류. 그 폐허의 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재건의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올해에도 마리아 교회에서는 성탄절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둘째.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삶은 거룩하고 인간은 존엄하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으므로 세상은 거룩한 곳이 되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 삶은 거룩한 것이 되었다. 죄가 없고 실수가 없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감싸시고 우리를 살리려고 애쓰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 삶은 거룩하다. 상처가 없고 고통이 없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 때문에 삶은 거룩하다.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삶은 거룩하다. 세상에는 죄가 많지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대학생 때에 반체제 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집행을 당하기 직전에 사면되는 극적인 경험을 한 인물이다. 감옥에서 성서를 읽은 그는 정치적 혁명으로부터 성서의 정신혁명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작품에는 주인공들이 대지에 키스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던 그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 소냐를 만나 성서의 복음을 듣고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죄를 고백하고 살인죄의 벌을 받게 된 라스콜리니코프는 대지에 입을 맞춘다.

민감한 양심의 소유자인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볼 때에, 인간의 온갖 추태와 변질된 욕망으로 오염되어 썩은 진흙탕 같았던 쌩테스부르그의 대지. 그 땅을 저주하는 마음으로 노파를 살해했다가, 사랑의 복음 앞에서 영혼의 부활을 체험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절망의 땅 쎙테스부르그가 이제는 희망의 땅으로 변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대지에 입을 맞춘다. 이제 대지는 더이상 오염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곳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속된 세상이 거룩한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죄와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오시니, 하나님 때문에 인간은 귀한 존재이다.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제 모든 인간은 하나님 때문에 존엄한 존재이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사람을 모욕하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 세상이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탄절은 이렇게 인간존엄성의 근거를 새롭게 제시한다.

세상이 고요해진 한 밤중에 이 땅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세상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고 우리를 존엄하게 만든 그리스도의 탄생. 기독교 교회는 성탄절의 메시지를 재현하는 예배의식을 지니고 있다.

정교회(Orthodox Church)의 예배의식이 그렇다. 그리스 정교나 러시아 정교에서는 신도들이 모두 서서 노래하며 예배를 드린다. 사람이 만든 어떤 악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그것은 성탄절 밤의 고요한 밤을 상징한다. 인간의 성과가 뒤로 물러나서 하나님에게 자리를 내어준 상태이다. 악기 소리가 없이 오직 사람 목소리를 가지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신도들의 목소리는 성탄절 밤의 성 바깥의 들판 위에서 들리던 천군천사들의 찬양을 재현한다. 찬양을 부르며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 찬양을 통해 땅이 하늘과 하나 되어 거룩하게 되는 신비를 체험한다.

셋째. 은혜가 진리에 앞선다

요한복음은 성탄의 메시지를 이렇게 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사람이 진리를 찾기 전에 진리가 사람을 찾아오셨다. 성탄절에 우리를 찾아오신 하늘의 진리는 우리를 가르치기 전에 우리 삶을 위로하신다. 태초에 위로가 있었다. 그것이 기독교적 진리이다. 사람들이 참 진리를 모르고 있을 때에 진리가 은혜롭게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래서 사람은 진리를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배워서 아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성탄절에 오신 진리는 우리를 위로하고 감싸는 은혜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가 진리에 앞선다. 성서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은혜와 진리”라고 하면서 은혜를 먼저 말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람은 먼저 그분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와 함께 참된 진리의 빛이 비추인다. 하나님의 은혜가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진리의 빛으로 인도한다. 은혜는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에 충만한 은혜이고, 진리는 은혜를 따라 비추이기 때문에 충만한 진리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탄절에 우리를 찾아오신 진리는 사람을 살리고, 살 수 있게 용기를 주고,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은혜이다. 우리 삶을 위로하시는 그 분의 은혜를 입을 때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평화의 진리에 가깝게 다가선다. 그리하여 남과 더불어 화목하고 세상이 평화롭도록 하는 진리의 힘을 갖는다. 은혜가 진리에 앞서고, 은혜가 도덕적 힘을 가져다준다. 우리의 고통을 같이 겪으시려고 몸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 속에서, 사랑과 진실과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는 진리의 힘이 생겨난다.

지난 12월 8일, 파리의 노트르담이 5년 동안의 수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다. 화재로부터 교회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소방대원들과 노트르담을 수리하고 복원한 목수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마크롱과 트럼프와 젤렌스키를 비롯한 세계의 정상들이 초청된 가운데에 열린 봉헌예배를 파리 대주교가 주관했다. 대주교가 봉헌예식을 따라 교회의 문을 여는 의식을 집전했는데, 세 가지 기도로 구성되었다.

노트르담, 믿음의 본이시여, 문을 열어 주소서. 그리하여 흩어져 있는 신자들이 기쁨 속에 모이도록 하소서.

노트르담, 사랑이 많은 어머니여, 문을 열어 주소서. 그리하여, 사랑과 진실과 정의와 평화를 찾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노트르담, 희망의 증언자여, 문을 열어주소서, 그리하여, 자비의 빛을 우리 위에 비추시고 부활의 승리가 우리 눈에 보이게 하소서.

노트르담(Notre Dam)은 ‘우리의 여인’(Our Woman)이라는 뜻인데,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첫 번째 기도는 교회가 신자들이 모이는 곳임을 알리는 것이고, 둘째 기도는 은혜가 진리에 앞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랑과 진실과 정의와 평화’는 진리의 내용물이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직면하게 만들고 정의에 민감하게 만들며 사랑하고 평화를 이룩하도록 이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사랑이 많은 어머니여’라는 문구가 먼저 나온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마리아를 가리킨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혜가 정의와 평화의 진리에 앞서는 것이다.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정의와 사랑을 행하고 평화를 이룰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 번째 기도문이다.

성탄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희망을 전해준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희망이므로 인간에게 좌절해도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를 찾아오신 그리스도 때문에, 죄로 얼룩진 속된 세상이 거룩한 곳이 되었고 상처많은 우리 삶도 거룩한 것이 되었다. 하나님 때문에 삶은 거룩하고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다. 은혜와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르치기 전에 위로하시고, 은혜를 입은 자들이 정의와 평화의 진리에 서게 되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그것이 성탄절의 메시지이다.

사진 1. 2024년 성탄절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드레스덴의 마리아 교회. 사진 2. 바깥에서 본 마리아교회. 사진 3. 서서 노래하며 예배를 드리는 러시아 정교회. 사진 4. 파리의 노트르담. 재개관 봉헌예배를 위해 대주교가 지팡이로 문을 두드리며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2024.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