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시편으로 시작한다. 시편 8편은 가장 아름다운 시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교 신앙의 장엄한 우주론과 함께 인간론과 자연관이 담겨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땅에는 아름다움, 하늘에는 영광.
성서에서는 하나님을 계신 곳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온 땅에 주의 이름이 아름답다는 것은 우주 자연과 인간세상 모든 곳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따라서 ‘아름답다’는 말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한 말이다.
우리 말 번역 ‘아름답다’는 말이 좋다. 하나님의 위엄은 미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땅은 그리 아름답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싸우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악한 사람들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신음하고, 권력과 부를 위한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세상과 함께 하시고 세상의 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 때문에 세상을 긍정하고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답다고 한 말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긍정이 종합되어 있는 것이다.
성 프란시스코는 새들과도 대화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인간과 만물이 한 결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이 보인다. 해와 달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들짐승과 가축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하는 중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 그렇게 만물은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고, 하나님 안에서 통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향해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갈라지고 찢긴 세상 속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의 눈으로 통합과 질서와 조화를 본다.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세상을 통치하시며 조화의 질서를 만드는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움직여지는이 세상에 해당하는 말이다. 조화와 평화를 만드는 주의 이름이 아름답고,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가며 살아가고 살려고 애쓰는 온 세상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키르케고어의 감각적인 차원과 칸트의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그리고 헤겔 철학의 정신 차원도 넘어, 하나님의 위엄 안에서 만물이 자기자리를 찾는 장엄함을 가리킨다. 그러한 종교적 영성으로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아름다움과 영광. 미학의 궁극적 경지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종교적 영성은 도덕과 정신을 초월한 차원으로서 도덕과 정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적 영성에서만 도덕과 정신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2절에서는 ‘대적자’와 ‘원수’를 무찌르는 하나님의 ‘권능’을 말한다.
1절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미학이나 목가적 평온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거짓과 악을 물리침으로 참된 질서와 조화와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리킨다.
죄와 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와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권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늘을 덮은 ‘하나님의 영광’(1절)은 온 땅을 통치하시며 대적자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권능(2절)을 가리킨다. 1절의 아름다움과 영광이 2절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표현된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떠드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익을 얻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며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에게 대드는 ‘보복자’이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아 오만하여지고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 그는 자기 권세를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는 자이니 불쌍한 자이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신다.’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
이 구절은 언어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젖먹이의 말은 단순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으나 천진난만한 입술로 무언가를 말한다. 시인은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오르간 소리를 언어라고 할 수 없지만 언어 이상의 언어로서 우리 영혼을 향해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젖먹이의 웅얼대는 소리도 단순히 소리에 그치지 않는다.
말 이전의 말, 모든 피조물의 첫마디는 찬양이다. 인간 언어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찬양하는 데 있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곧 거짓과 폭력의 죄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세상이 계속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구할지라도”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할지라도”(시편 4편)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찬양하는 자를 남겨둘 것이다. 그들을 통해 세상의 죄와 부당한 처사와 폭력을 다스리고 꾸짖을 것이다. 어른들이 하지 않으면 젖먹이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라도 일하신다. 예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를 외친 자들은 어린 아이들이었다(마태 21:15).
하나님의 대적자와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죄이다.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저지르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세상의 죄와 폭력. 그것이 하나님의 싸움의 상대인 사탄이다. 사람은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임재해서 사람이 만든 세상의 죄와 싸우게 하신다. 만일 사람이 그 일을 못하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마태 3:9)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을 통해 일하신다. 그래서 온 땅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고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
3절 이하에는 우주론과 인간론이 나온다.
3절. “주께서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주신 달과 별을 보오니”
하늘과 달과 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천체에 질서가 부여되어 하늘이 높이 자리 잡고 달과 별들이 제자리를 찾아 운행된다. 이 모든 질서와 조화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해와 달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3절은 인간이 오랫동안 섬겼던 자연종교에 대한 거부이고,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받는 자연신을 배척하는 신앙고백이다.
‘주의 하늘’이라고 했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들을 주관하신다. 땅에서는 사람과 함께 통치하시지만, 하늘은 하나님의 직접 통치의 영역이다. 하늘이 안정되지 않으면 천재지변으로 인해 땅은 잠시도 존속할 수 없다. 땅에서는 인간의 죄의 힘이 무력해져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으로 기도의 제목이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늘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주의 하늘’이라고 함으로써, 시인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지으신”이란 표현은 물건을 빚는 인간의 손을 빗대어 쓴 말인데, 혹시 미켈란젤로가 이 구절에서 영감을 얻은 것 아닐까? 그래서 천지창조를 그릴 때에 하나님과 아담이 서로 손가락이 닿게 그린 것 아닐까?
4절과 5절은 성서의 인간관을 보여준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니까?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낱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 말을 사람에게 적용한다. 하나님 때문에 사람은 존엄하다.
매일 온 땅을 비추어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하늘의 해와 달에 비교하면 사람은 미약해 보인다. 겨울의 추위에 약하고 여름의 홍수에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은 강해 보이지만 때로는 참으로 약한 존재이다. 조화롭게 운행되는 하늘의 수많은 별들에 비하면 인간 사회는 불화와 전쟁으로 가득하다. 사람은 참으로 욕심이 많고 때로는 너무 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람에게서 영광과 존귀를 본다. 하나님이 그를 생각하시고 그를 염려하시며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마음을 주는 존재로서 인간은 존엄하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성의 본질은 ‘자유’라고 보고 인류 최초로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썼다. 루터는 16세기에 기독교 정신을 되살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써서 근대를 열었다. 그리고 루터를 이어받는 칸트는 “인간은 자율적 존재로서 존엄하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자유로운 주체로서 하나님의 파트너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억지로 하지 않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주체성과 양립한다. 그 자유와 주체성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씌어준 ‘영광과 존귀의 관’이다. 인간의 주체성은 하나님의 주권보다 ‘조금 못하지만’(4절) 인간을 존귀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인간이 자유를 잃지 않고 개인이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늘 “그를 생각하시고 돌보신다.” 재산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권력으로 사람을 제압하며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자들에 대한 저항. 그 저항과 투쟁은 인간을 생각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에 종속되어야 한다. 인간의 주체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종속되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구속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구속될 때에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하나님의 자유는 사랑이고 사랑이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도 사랑을 향할 때에 자유를 파괴하지 않고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진리란 자유와 사랑이 이루는 평화를 가리킨다. 내면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이다. 그 때에 인간은 삶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때에 인간에게 주어긴 “영광과 존귀의 관”에서 나오는 빛이 주변에 비치고 세상을 채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

6절과 7절은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점을 말한다. 이것도 성서의 독특한 인간관이다. 소와 양과 들짐승, 그리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인간이 발밑에 두고 다스린다. 하나님이 다스리지만 인간이 다스린다. 하나님의 통치는 조화와 평화를 만든다. 그렇듯이 자연을 다스리는 인간도 조화와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자연 통치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라고 해서 자기 멋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소유권에서 자유의 시작을 보았다. 소유물에 대해서 인간은 자기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자유를 내세우며 소유권 절대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으로 소유를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자연자원을 파괴하고 착취하면, 자연의 질서와 조화가 깨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거스르는 일이고, 결국 인간에게 재앙이 돌아올 것이다. 시베리아와 아테네와 호주 대륙의 거대한 산불. 빙하가 녹아 사라지면서 높아지고 있는 해수면, 지구촌 여기저기에 느닷없이 닥치는 대형 홍수.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깨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는”(시편 4편) 욕심의 문명이 만들어 낸 대재앙의 신호이다.
자연만물을 사람 발밑에 두었다는 것은 자연을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이다. 자연을 함부로 다루고 조심성 없이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데 자연을 이용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성서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8절: 1절을 반복하며 우리가 부를 찬양의 내용을 전한다. “온 땅에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존엄성, 삶의 영광과 존귀함, 자연의 질서와 조화. 온 땅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이다.
사진 1. 북한산 의상봉의 소나무.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눈을 머리에 이고 서 있다. 2.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시스코(이탈리아 아시시, 성 프란시스코 교회 벽화) 만물이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말이 통하리라. 3. 프랑스 타미에 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