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해서 통 관심이 없었던 내가 학문 교류를 계기로 일본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2013년 1월이었다. 그 이후 여러 번 오가면서 일본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 되고 배운 것도 많다. 내가 가는 곳은 늘 정해져 있는데, 일본의 고도인 교토이다. 목적지가 늘 교토대학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토에는 오래된 건축물과 예술품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교토에 가면 ‘나라’도 가끔 들른다. 그곳 역시 일본의 오랜 역사가 보존된 곳이다. 한반도와 얽혀 있기도 하고, 풍광 자체에서 일본의 특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해서 교토와 나라는 지금도 나의 관심을 끄는 도시이다. 다른 곳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교토의 사찰들에는 보물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데, 돌아가면서 몇 년 만에 한 번 씩 시민이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 그래서 교토에 갈 때에는 그 기간에 문화재를 개방하는 사찰을 미리 알아두고 방문한다. 일본 사찰이나 문화재의 분위기가 우리 정서와 썩 맞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수차례의 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옛 시대의 문화재들을 감상하다보면, 고급 예술품이 주는 향기 속에서 정신이 호강을 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일본인들이 한반도와 교류하며 삶을 관조하는 미학을 만들어가던 옛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간 느낌을 받아 숙연해지기도 한다.

 

 

교토에 가면 늘 만나게 되는 친한파 일본인들이 있다. 나까무라 선생과 후지사와 선생이다. 모두 나보다 연배가 많은 분들인데, 이분들의 사연이 독특해서 일본에 가면 꼭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된다. 한국인인 내게는 귀한 분들이다.

 

 

오사카에 사는 나까무라 선생은 원래 오사카 외국어 대학을 나오고 영어 선생님을 하던 분이다. 이분이 나이 마흔이 되던 해에 한국에 여행 왔다가 우연히 동화작가들을 만나게 되고 한국동화에 빠져 버렸다. 나까무라 선생은 자기 직업을 포기하고 한국동화 연구에 들어갔다. 일 년에 몇 차례씩 한국에 와서 서울의 신촌에 터를 잡고 도서관에서 한국동화를 공부하고, 지방을 다니며 동화작가들을 만나기도 하고, 동화를 채집하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한국동화를 일본어로 번역해서 출판하는 일을 시작했다. 나까무라 선생이나 출판사에게 모두 돈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일은 벌써 4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일어를 할 줄 몰라서, 우리는 만나면 한국어로 대화한다. 생계를 어떻게 꾸리냐고 물으면, 마누라 덕에 산다고 웃으며 대답하신다. 선생의 아내는 공무원이다. 남편이 하루아침에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걸 받아준 아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은 아내가 제일 무섭다고 유창한 한국어로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지금은 아내분도 은퇴해서 아마 두 분이 연금으로 생활하실 게다. 나까무라 선생과 그분의 아내분도 대단하지만, 회사경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한국동화를 출판하는 일본의 출판사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까무라 선생은 지금도 한국동화 연구모임을 이끌고 있는데, 매달 십 여 명 안팍으로 모이는 것 같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좀 여유가 있어서, 나까무라 선생이 방한하면 학교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도록 해드렸다. 한국음식을 좋아하시고 엄청 많이 드신다. 한국에서 대접받은 일을 일본 동료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한다. 나로서는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선생으로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누군가가 인정해준다는 느낌을 받으신 모양이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돈도 안 되고 빛도 나지 않는 일을 평생을 바쳐 하는 것은 외롭기도 했을 테니, 작은 대접이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나까무라 선생을 보면서 일본인의 독특한 점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번 다니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일본에는 아마추어 전문가들이 많다. 한번은 고베시의 청년회관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강의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 노신사가 같이 배석했다. 그 분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회사 사장을 하다가 은퇴하고 한국의 동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송기숙 선생이 청년들을 위해 펴낸 동학관련 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해 출판했다고 한다. 나도 잘 모르는 동학의 역사를 학자도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 공부하고 번역까지 해서 출판한 것이다. 그는 동학의 거의 전문가 수준까지 된 셈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깊게 파고드는 일본인들의 취향과 삶의 모습을 몰 수 있었다.

 

 

일본에 가면 만나게 되는 또 한 분의 친한파 인사는 후지사와 선생이다. 이분은 나라에 산다. 나와는 주로 교토에서 만나지만 한번은 그분의 안내로 나라의 문화재들을 관람하며 역사를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 못 알아듣고 건성건성 들었는데, 나중에 일본역사를 좀 공부하고 보니 정말 중요한 얘기들을 들은 셈이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나라에 가서 후지사와 선생과 산책하며 유적에 얽힌 일본 고대사에 대해 듣고 싶다.

 

 

 

 

 

 

후지사와 선생은 역사학자이다. 그분의 아버지 역시 역사학자요 고고학자였으며, 일제강점기 때에 만주에 가서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후지사와 선생의 할머니는 아들이 만주에 있는 동안 한국 부여에 와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후지사와 선생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있는 한국의 부여로 돌아왔다. 부여에 머무르며 그 분은 중요한 고고학 발굴의 성과를 이뤄내었다. 부여 일대의 백제 유적을 발굴했는데, 그중에는 백제의 정림사지 오층석탑도 들어 있다.

 

 

한국인은 부여에 가면 누구나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찾게 된다. 망한 나라 백제의 유산이요, 얼마 남지 않은 백제의 탑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정도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대전의 배재대학교에 있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부여에 여러 번 갔었다. 갈 때마다 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꼭 찾았다.

 

 

지금은 많이 단장하고 정비되었는데,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벌판에 탑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탑에는 백제를 정복한 당나라 소정방의 글씨도 새겨져 있다. 그 글을 보면서 망국의 한을 안은 이 땅의 선조들의 고난과 슬픔이 다시 살아나는듯함을 나는 느끼곤 했다. 동시에 그런 역사를 간직한 채 천오백년의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 탑이 너무나 귀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탑을 발견한 사람의 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후지사와 선생은 부여에서 임신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에서 일하던 일본여인이었다. 후지사와 선생의 아버지가 부여에 머물면서 두 분이 좋아하게 되었고, 거기서 후지사와 선생을 임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온 가족이 일본으로 귀국하고 후지사와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분으로서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나 어려가지 기록물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의 부여박물관에 모두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도 부여에서 일 년에 한번 열리는 백제문화제에 초청받고 자주 오시는 것 같다.

 

 

사실 백제문화제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온다고 하는데, 나라가 멸망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백제인들의 후예가 조상의 나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660년에 부여에서 망한 백제의 부흥을 위해 백제의 장군 귀실복실이 성을 쌓고 전쟁을 준비하고, 일본에 있던 백제의 왕자 곧 의자왕의 동생인 부여풍(여풍장)이 돌아와 합류했다. 일본은 국력을 기울여 1천 척의 배와 3만 2천의 군사를 백제로 보낸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와 일본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고 난 후 백제 귀족들은 고국의 땅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온다. 그때에 일본으로 넘어온 숫자가 20만에 이른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일본서기』는 그 일을 기록하며 마지막에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오늘로써 백제는 끝났다. 이제 곰나루의 조상 묘를 언제 다시 찾을까?” 고향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으니, 공주에 있는 조상의 묘를 찾을 수 없게된 백제인들의 통곡이 들리는듯 하다.

 

 

천오백년 전에 울며 이 땅을 떠났던 이들의 후예들이 백제 문화제를 통해 다시 조상의 땅을 찾고 있으니, 그리움이라는 것은 긴 시간을 뛰어 넘어 이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은 죽어 이 땅에서 사라져도 그리움은 이어진다.

 

 

나까무라 선생과 후자사와 선생. 두 분은 오랜 교류의 역사를 지닌 한국과 일본을 잇는 민간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1. 고베에서 수기무라 선생과 함께(2015년) 2. 나라의 동대사에서 후지사와 선생과 함께(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