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이 시작되었다. 20년 전에 나는 TV에서 상당히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고, 그 장면은 내 마음 속에 사순절의 상징적 사건으로 간직되어 있다.
2006년 여름에 안식년을 맞아 영국에 가 있었다. 어느 날 TV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한 젊은 영국인이 온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아프리카 잠비아의 한 축구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방송을 지켜보니, 앤드류 호킨스(Andrew Hawkins)라는 이름을 가진 그 영국인은 자기 조상의 죄를 참회하고 있었다. 그의 조상은 노예무역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의 후손이 노예로 팔린 아프리카인들의 후손들에게 참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서를 비는 그날 행사에는 영국인뿐 아니라 프랑스인과 독일인 등 유럽인들이 참여했고, 아프리카인들도 있었다. 아프리카 현지인들 중에도 동족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37세인 그 영국인의 조상의 이름은 존 호킨스(John Hawkins)였다. 영국이 강국으로 발 돋음 한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때에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노예무역으로 돈을 번 최초의 영국인이고, 왕실의 부가 늘어나는 데에도 공헌했다. 수차례의 노예무역을 통해 쌓은 그의 항해실력과 해상전투 경험 때문에 여왕은 그를 해군장관에 임명했다, 호킨스는 영국 함대를 새로이 건조했고, 뛰어난 전술로 당시에 막강하다고 알려진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영국 역사에서 호킨스는 영국 해군의 아버지로 칭송된다.
앤드류 호킨스는 존 호킨스가 태어난 플리머드 시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 존 호킨스는 플리머스 시에서 추앙하는 영웅 중의 하나였고, 앤드류 호킨스는 여기저기에 걸린 할아버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그가 서른 한 살이 되던 2000년에 한 저널의 기자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존 호킨스가 노예 무역상이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배가 “루벡의 예수”(Jesus of Lubeck), “하나님의 은혜”(Grace of God)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배가 노예 무역선이었다니. 그는 조상의 죄와 위선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서 몇 개월 동안 배에 갇힌 채 팔려가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인가?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부당한 소득을 정당화하고 부도덕성을 눈감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을 노예로 팔아 부자가 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다. 그는 말한다. “노예무역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용서를 빌기 위해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각국의 경쟁 속에서 노예무역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죄의식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죄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앤드류 호킨스는 말한다. 그는 2차 대전 때에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처럼 노예무역을 홀로코스트라고 본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할 수 없듯이, 아프리카인들의 홀로코스트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450년 전의 조상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너무 오래된 일이고, 용서를 해 줄 피해자들은 고난 속에 살다가 가고 없지 않은가. 용서를 빌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는가? 앤드류 호킨스는 말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늦은 시간이란 없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백인들의 행진을 아프리카 잠비아의 군중들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군중이 참회의 진정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잠비아 부통령이 연단에서 내려와 쇠사슬을 매고 있는 백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든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누군가 회개하고, 누군가는 그 회개를 받아들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아닐까. 과거의 잘못에 대해 그 후손이 용서를 빌고, 피해자의 후손이 받아들이고. 그래야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인간사회에 미래가 있지 않을까?
미래라는 시간은 우주론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다. 미래는 신학적 시간이다. 성서적 시각으로 보면, 내일 해가 뜰지 뜨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 시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시간의 존재는 하나님의 의지에 달렸다. 세상이 너무 무지하고 악해서 희망이 없으면 내일은 없다.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완악해져서 회개할 줄 모르면 미래가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희망을 거두시면 미래가 없다. 그것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멸망사이고, 신약성서에 나오는 종말론이다. 회개할 줄 아는 이들, 남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이들, 그들은 이 땅의 미래를 만드는 이들이다.
존 호킨스의 후손인 앤드류 호킨스. 자기 조상의 죄를 회개하는 일은 용기 있는 일이다. 오래 전에 별 죄의식 없이 한 일이라도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지금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일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존재로의 용기(courage to be). 회개만큼 이 땅을 정화하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회개하는 용기와 회개를 받아들이는 용기, 그것은 세상을 다시 창조한다. 오염되고 혼탁한 세상을 씻고 다시 세운다. 회개는 세상이 망하는 것을 막는다. 존재로의 용기이다.
그게 인간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메타노이아 곧 회개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닌가. 조상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기 위해 몸에 쇠사슬을 걸친 유럽의 젊은이들. 나는 그들에게서 기독교가 유럽에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태 16:40)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세상을 향해 한 말씀이다.
요나의 기적은 무엇인가. 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기적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의 회개를 가리킨다. 부가 넘치고 최고의 건축물들이 즐비했던 당시 최고의 도시 니느웨, 자신감과 자만심에 넘쳤던 도시 니느웨는 요나로 인해 회개로 돌아섰다. 왕부터 보좌를 벗어나 베옷으로 갈아입고, 대신들과 백성들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음식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었다. 그것이 요나의 기적이다. 회개는 기적이다. 더구나 무슨 특별한 재앙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회개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기적이다.
금식하여 주리면 말할 힘도 없어져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인간들의 소리가 조용해질 것이다. 그것이 기적이다. 도시 전체에 회개의 영이 불어 모두가 낮아진 것, 그것이 기적이다. 다른 무슨 기적을 구하겠는가. 배가 불러 마음껏 떠들고 자기가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이 입을 닫고 회개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정화하는 예배요,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날 것이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눈에 띄게 사람들 중에 움직이실 것이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악한 세상을 향해 말씀하셨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 12:4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회개의 영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를 바꾸었지만 그리스도는 세상을 바꿀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회개의 기적이 일어나고, 그렇게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에게 회개는 여전히 기적이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34)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하신 말씀이다. 하늘에 걸린 십자가에서 지금도 이 말씀이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다.

호킨스 가문의 문장. 아프리카 노예의 모습이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