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개인적인 잘못도 많이 저지르며 살지만, 세상이 다 같이 한 마음으로 짓는 죄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살기 때문에 죄로 인식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관습과 제도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속에 폭력이 들어 있으면,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을 가리켜 구조악이라고 부른다. 구조악이란 삶의 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악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 구조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모른다. 물론 양심에 거리끼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양심으로는 걸러지지 않는 폭력, 그것이 성서와 교회가 주목한 죄요,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라고 부른 것도 그것을 가리킨다. 원죄란 인간의 영혼과 몸에 아주 깊이 뿌리를 내려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죄의 힘을 가리킨다. 사람의 죄는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많다. 죄의 진짜 정체는 의식적으로 짓는 죄보다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에서 찾아야 한다. 죄인 줄도 모르기 때문에 고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 점에서 인간은 무지하고 무능하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죄를 말하며, 성령의 능력으로만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때에는 자기가 짓는 죄가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를 회개할 줄 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죄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회개를 통해 인간의 영혼이 소생될 길을 열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말도 그 뜻이다.

그동안의 공부의 여정에서 내게 인간의 원죄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 준 두 사람이 있다. 칼 마르크스와 르네 지라르이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대학에서 행한 첫 번째 신학강좌는 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관련된 것이었고, 마지막 강의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기독교 문화권의 산물이다.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기독교의 원죄론의 영향권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분석은 기독교적인 측면이 많은데,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기독교와 거리가 멀다.

칼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인간의 인식과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것을 가리켜 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정치적 이념을 가리켜 이데올로기라고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 또는 위선적 인식과 생각을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그런 허위의식이 부르주아지 계급에게만 있다고 주장했고, 돈 있는 사람들이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기 위해 인식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허위의식은 특정계급의 산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일부러 잘못 아는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일부러 잘못 안다. 다시 말해서 사물과 사태를 파악할 때에 자기에게 유리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모든 인식의 왜곡이 경제적 이득을 위해 일어나지는 않지만, 경제적 계층의 차이가 인식의 차이를 가져오는 부분이 큰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이념의 차이, 정치적 견해의 차이, 끼리끼리 뭉쳤을 때에 타 집단에 대한 적대감 등도 인식의 왜곡을 가져온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자기편에 유리하게 해석하고 인식한다.

그런데 왜곡된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다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차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일부러 잘못 아는데, 그 ‘일부러’가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일부러’ 사태를 왜곡해서 인식한다. 왜곡이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가 ‘일부러’ 잘못 인식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믿는 것이 객관적으로 옳으며 진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이득에 대한 관심이 자기 내부에서 작동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일부러 사태를 왜곡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인간의 무지이다.

왜곡된 인식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자신을 속인다. 그리하여 왜곡된 인식들이 힘을 가지고 서로 충돌해서 싸운다. 행동은 인식에서 나오는데, 인식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생각을 처음부터 뜯어 고쳐야 하는데, 자신의 생각이 객관적인 진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 무서운 무지(無知)이다. 무지는 무식이 아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은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산다. 자신의 지식으로 자신의 왜곡된 인식을 변호한다. 지식이 무지를 더욱 키운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사람은 그런 세상을 키운다.

십자가 밑에서 회개하는 종교인 기독교 덕분에 인간 세상에 감추어진 죄와 폭력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과 과오가 무언지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알고도 행하지 못한다. 무능(無能)이다. 이득을 위해 인식을 일부러 왜곡하고 있음을 알아도 고치지 못한다. 똑같은 얘기를 두고도 사람은 여전히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알아듣는다. 그래서 진실은 멀고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진실하다고 생각하며 서로 싸운다.

“자기 허물을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편 19:12).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다. 진실의 왜곡이 많은 세상에서 기독교인은 자기가 혹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는 사람들이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는 사태를 파악했다고 하지 않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경제적 이득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인식의 왜곡을 막고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평화의 왕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보며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