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면서 인간의 원죄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 준 또 한 분의 학자는 르네 지라르(1923-2015)이다. 프랑스 출생으로서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가르쳤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이론으로 유명하다.

인류는 희생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인류학자로서의 그의 결론이다. 사람은 피를 봐야 싸움을 멈추고 질서를 찾으며 정서가 안정된다. 희생양의 피는 공동체 구성의 원리이고 인류의 생존전략이다. 피 흘리는 희생양이 없으면 서로 싸워서 공동체는 붕괴된다. 사람은 남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모방욕망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어 있다. 그리고 증와 폭력도 모방되어서, 한번 발생한 모욕이나 폭력은 걷잡을 수 없는 집단적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져든다. 모방욕망 때문에 인류는 발전했지만, 모방욕망 때문에 인류는 항상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종말론도 그런 의미이다.

서로 싸워서 다 같이 망하는 대신에 한 사람에게 폭력을 집중한다. 한 사람이 죽는 대신에 전체가 살 수 있다면, 모두의 생존을 위해 좋은 선택이다. 성경은 왜 인류의 첫 사건을 살인으로 기록했을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은 희생양 메커니즘이 인류의 생존 비결임을 말해준다. 그 점에서 성서는 인류학자들의 관찰과 일치하는 과학이라고 지라르는 말한다.

희생양 만들기는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희생양이 발생한다. 직장에서 누군가 따돌림을 받기도 하고, 아이들은 누군가를 놀리며 즐거워하고, 때로는 정의의 이름으로 군중이 수많은 희생양을 만들기도 한다. 무고한 사람이 다치고 피를 흘리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군중은 언제나 피에 굶주려 있다. 누군가 잘못 걸리면 집중적으로 돌팔매를 맞거나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아무나 희생양을 만들지는 않는다. 희생양 만들기도 사람 봐 가면서 하는 거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개 대항할 힘이 없는 장애인이나 노예나, 가난한 집안의 아이나, 죄인이나, 이질적 집단인 이방인들이 제물이 되어 공동체의 평화에 이바지 했다. 그들은 평소에도 차별받다가, 중요한 절기에는 제물이 되어 신에게 바쳐졌다. 인신공양은 차츰 가축으로 바뀌었지만, 희생제사가 사라진 현대의 민주사회에서도 희생양 만들기는 지속되고 있다. 오히려 더 은밀하게, 그리고 더 폭넓게 진행되는 면이 있다.

근대 이후로 신분차별이 없어지면서 경쟁사회가 되었다. 말하자면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끼리 경쟁하던 것이 이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 곧 무한경쟁의 사회가 되었다. 비교에도 끝이 없어져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비교가 발생하고 있다. 경쟁과 비교 속에서 인간의 좌절감과 부러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시기심은 증오로 바뀌고, 군중은 증오의 대상을 찾으며, 자기도 모르게 희생양의 피에 굶주려 있다. 여전히 약자나 이질적 집단은 언제든 물리적 폭력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요즘처럼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유명인들이 어떤 계기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들에게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언어폭력이 동원된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한 군중의 이야기가 있다. 드러내 놓고 돌팔매를 던질 수 없는 문명사회에서는 어떤 명분을 만들어 각종 인신공격과 인격살해의 언사를 통해 물고 늘어지는 방식으로 희생양을 만든다. 요한복음에 돌을 든 무리가 등장하듯이, 현대사회에서 군중은 성서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떼를 지어 공격하므로 책임자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SNS 상의 군중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 너무 어려운 언어폭력의 패거리가 되곤 한다.

폭력은 맹목적이다. 아니, 욕하고 저주하는 폭력 자체가 목적이다. 공격당한 사람이 자살이라도 하거나, 그 집안이 파탄이 나면 군중은 잠시 잠잠해진다. 피를 보았고, 그래서 군중은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불만과 증오심이 희생양의 피로 대리 만족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느끼는 만족감이 자기도 모르는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준다. 잠시 뿐이지만, 그렇게 해서 폭발직전의 사회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역시 그 안정감은 잠시 뿐이므로 군중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의식적으로는 개인의 인권이 중요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이 죽더라고 사회 내에 쌓인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는 자연선택의 힘이 압도적이다. 무의식이 의식을 압도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성욕보다는 희생양 만들기에 통하는 말이다.

군중이 피를 보고 느끼는 만족감은 일종의 정화 작용에서 생기는 것이다. 정화란 죄를 씻는다는 뜻으로 오래된 종교 용어이다. 부정탄다는 우리 말은 정한 것이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부정타는 것이 죄의 핵심이었다. 희생 제사와 예배는 부정한 것을 씻고 정화하고 죄사함을 받아 공동체를 재앙에서 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현대의 군중도 희생된 자의 피를 보면 부러움과 시기심에서 생긴 폭력성이 해소된다. 까닭 없이 미워하는 죄, 또는 지나친 증오심이라는 죄가 정화되고 사라진다. SNS에서 비난과 조롱의 글에 시달리던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자살이라도 하면 갑자기 잠잠해지는 군중의 인신공격은 알고 보면 수 만년 이어진 종교현상이다.

사람이나 동물을 제물로 드리며 굿판을 벌이던 자연종교가 기독교의 등장으로 뒤안길로 접어들었지만, 사람은 여전히 아주 오래된 자연종교에 의해 움직인다. 사람을 산채로 묻거나 배를 갈라 피를 사방에 뿌리고 신에게 바치던 그 옛날의 굿판, 소를 잡고 돼지 목을 잘라 바치던 그 굿판이 애국과 정의라는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대중사회에서는 무당 대신에 군중이 굿을 하는 셈이다. 군중이 무당이 되어 칼춤을 춘다. 옛날에는 굿하는 장소가 정해져서 이른바 성소에서 행해졌으나, 성과 속이 사라진 세속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 잡는 굿판이 벌어지고, 시내 한복판의 광장에서 피 냄새 나는 굿판이 벌어진다.

정치는 언제나 희생양을 요구한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들이 시민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콜로세움에서 죽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이 사자의 밥이 되거나, 검투사끼리 싸워 피 흘리며 죽을 때에, 군중들은 열광했다. 황제로서는, 각종 불만과 원망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달래며 가라앉히려면 피가 필요했다. 피 비린내 나는 인간 제물들은 로마의 종교였고, 콜로세움의 굿판은 나라를 안정되게 만드는 중요한 통치 기술이었다.

현대 정치도 희생양을 요구한다. 같은 편을 만드는 데에는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 쉬운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파들이 네거티브를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사용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군중은 늘 공격할 대상을 찾고 있기 때문에, 증오할 대상을 던져주면 군중은 문명의 빛 아래에 감추어두었던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낸다.

군중은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명분을 근거로 애국심에 불타서 광기에 가까운 증오를 내뿜는다. 증오심에 불타면서도 그걸 애국심으로 느낀다. 의식은 애국심이지만, 무의식은 누구의 피든 피를 봐야하는 증오심이다.

손에 돌을 든 채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서슬이 퍼런 무리들. 예수님은 그들을 제압했다. 그들의 맹목적 살기를 제압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가게 만들었다(요한 8:3-11).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검투를 금지했다.

요한복음 8장은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의미한다. 희생양의 피를 보고 안정을 찾는 방식은 예수의 평화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치는 새로운 정치의 탄생을 예고한다. 기독교인의 정치는 희생양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증오심의 굿판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와 함께, 안정과 평화를 만드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세상은 여전히 희생양의 피로 질서와 평화를 찾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함께 새로운 평화를 시작하셨다.  부추겨진 증오심에 가득차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을 공연히 원수로 만드는 사람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군중의 증오심에 같이 놀아나지 말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군중에서 벗어나 개인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을 죽이려던 무리는 군중으로 왔다가 예수의 권위 앞에서 개인이 되어 돌아갔다. 모방욕망에 가득 찬 군중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앞의 단독자가 된 사람이 성서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교회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사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워진 개인으로 만드는 곳이다. 그런 개인들의 모임은 군중을 이루지 않는다. 교통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성도의 교통은 군중이 주도하는 세상과 대치한다. 

군중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를 좋다고 따라 다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던 그들이 왜 군중이  되어 예수를 죽이려 했는가? 선동 때문이다. 가야바 같은 제사장들과 헤롯당 같은 정치인들에 의해 부추겨진 증오심에 놀아나, 군중들은 예수를 죽이고 싶어 했다. 오래된 자연종교의 희생양 만들기, 그 굿판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있던 광장에 모여 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수를 죽이시요. 바라바는 놔 주시요(요한 23:18).

예수께서 그들의 외침대로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군중의 폭력을 당하셨다. 사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사탄의 손에 스스로를 맡겼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들과 함께 개인이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다. 

결국은 사탄과 그리스도의 싸움일 것이다. 증오심을 부추기는 적그리스도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싸움일 것이다. 결국은 광장과 교회의 싸움일 것이다. 거짓교회와 참 교회의 싸움이 될 것이다. 군중과 성도의 싸움이 될 것이다.

사순절은 슬퍼하는 절기이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뒤따라 가며 슬퍼하는 절기이다.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막을 힘이 없다. 그러나 슬퍼할 수는 있다. 그날 그 여인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순절은 성도가 되어보는 절기이다. 군중으로 살다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도가 되어보는 절기가 사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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