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온 세상이 함성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대기를 가득 채운 생명의 소리와 함께 봄이 왔다. 겨우내 죽은 것만 같았던 시커먼 가지들 사이사이로 꽃망울이 열렸다. 산책길 머리 위를 채운 화사한 벚꽃은 모두에게 주는 계절의 선물이다. 벌들이 모여들고 새들이 꽃가지 속에 묻혀 노래하니 생명의 잔치가 아닐 수 없다. 저녁부터 고마운 봄비가 내리는데, 다만 꽃이 모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고마운 비가 개지 않으니 나를 붙들어 두려는가 (好雨留人故不晴)

창 너머로 하루 종일 강물 흐르는 소리 듣네 (隔窓終日聽江聲)

멧비둘기도 봄 오는 소식 알리느라 (斑鳩又報春消息)

개살구꽃 옆에서 구룩구룩 울어대네 (山杏花邊款款鳴)

“비를 만나 신륵사에 묵다”(阻雨 信宿神勒)는 제목의 시로서, 500년 전에 신광한이란 분이 지었다.

봄비는 고마운 비다. 마른 흙에 생기를 주어 각종 풀들과 봄나물이 파랗게 올라오니 갑자기 세상이 풍요로워지는 것 같지 않은가. 논농사를 중시했던 과거에는 모내기를 위해서 넉넉하게 비가 와주어야 했으니, 봄비 내리는 소리는 하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저절로 일으켰을 게다. 요즘에는 산불 방지 때문이라도 비가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길 가던 객은 비가 그치지 않아 절에 머물게 되었다. 신광한은 조광조의 개혁에 동참했던 인물로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다. 조광조를 비롯해서 많은 동료들이 옥사하거나 귀양 갔다. 그는 중앙 정치를 떠나 지방에 은거하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봄비가 내리며 길을 막았다(阻雨). 하늘의 뜻인지 그곳은 여주의 신륵사 근처였고, 결국 신광한은 절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한다. 그러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 년이 되고, 그러다가 무려 18년간을 신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19세기 초에 정약용은 강진 다산초당에서 18년 유배, 16세기 초에 신광한은 여주 신륵사에서 18년 은거.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험악한 정치무대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할 곳이 있었다. 그곳은 자연이다. 어차피 유학은 자연을 모델로 삼아, 큰 욕심 없이 물 흐르듯 흘러 거침을 모르는 자연의 리듬에서 자유를 얻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자유의 덕으로 정치를 하여 세상을 평안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정치는 덕으로 할 수 없는 것이요, 정파 싸움에서 인재들이 제거되는 운명이 반복되었다.

신륵사는 남한강 가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자연이 주는 선물, 봄의 품에 안겨 신광한은 봄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비가 오니 밖에 나가지 못하고 방 안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물이 불었는지 강물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산비둘기 울고 살구꽃이 피어 있다.

비와 강과 산비둘기와 개살구꽃. 궁궐에서 보던 모란과 작약이 아닌 개살구꽃이라니. 창덕궁 후원 잘 자란 나무숲 속에서 들리던 각종 아름다운 새소리가 아닌 너무나 단조로운 구룩구룩 산비둘기 소리. 그 어느 것 하나 화려한 것이 없다. 시 전체가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담담하고 차분한 시인의 감정이 전해지는 것 같다. 이어서 18년을 지냈다니, 그날 들었던 소박한 봄의 소리가 시인에게 위로가 되고, 살아갈 길을 안내하는 길라잡이가 되었던 모양이다.

500년 후 한 한국인이 한강 하류 부근에서 봄 비 온 뒤 아침에 성서의 구절을 생각한다. 아론의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민수기 17:8) 뿌리에서 잘려나가 죽은 나무막대기에 불과한 지팡이에서 움이 돋고 꽃이 피었다니. 성서는 왜 이런 얘기를 기록했을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모세의 지도력을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고생해야 했다. 미래를 위한 자유를 얻었지만 당장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어진 그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 절망은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났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주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주님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수기 16:3)

그들이 절망을 이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로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세우는 방식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요 다만 권위를 가진 자여야 한다. 권력과 권세(potestas)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고, 사람들의 지도자에게는 권위(auctoritas)가 주어지면 된다. 그러면 지도자의 지위는 기능만 수행할 뿐 인간을 지배하지 않게 된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통합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중심 권위가 있고, 그 권위를 가진 자가 사람들 위에서 지배하는 권력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론의 지팡이에서 움이 트고 꽃이 피게 하셨다. 생명의 흐름을 되돌려 메마른 지팡이에 물이 올랐다. 땅에서 뿌리가 뽑힌 메마른 나무 막대기에 물이 올라 움이 텄다. 생물학적인 현상과 영적인 현상의 일체화이다.

사람의 눈에는 생물학적인 현상만 관찰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명의 뿌리는 창조주인 하나님이다. 뿌리가 뽑힌지 오래되어 죽은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 생명의 영적인 뿌리인 하나님에게 뿌리를 내리면 다시 살아나 꽃을 피운다. 생물학적 존재를 기반으로 영적인 차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생물학적 생명의 근원이다. “하나님, 당신이 말씀하시니 세상이 있게 되었고, 당신이 명령하시니 세상이 굳게 서 있나이다.”(시편) “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피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언 3)

보이는 것에 실망하고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하게 한 것, 그것이 아론의 지팡이에 난 싹, 지팡이 위에 핀 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지팡이의 부활이 있었다. 하나님은 희망의 근거이다. 희망이란 절망을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 신광한에게 희망을 준 신륵사의 개살구꽃과 함께 아론의 지팡이에 핀 살구꽃을 생각한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아론의 지팡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인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