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알려졌다. 그래서 그분의 부활은 참되다. 모두가 아는 부활은 자연종교의 산물이요, 미신이기 때문이다.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전한 그분의 첫 말씀은 평화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pax vobis).‘(요한복음 20:19)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은 세상과 다른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 분의 사랑과 평화가 세상을 살리고 세상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없다. 그러나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삶과 증언은 죽음 이후에도 살아서 그분의 영과 함께 일할 것이다.
지난 월요일 곧 4. 21일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부활절 다음날이다. 부활절 아침에 성 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나타나 대중을 축복하고 인사한 것이 마지막 행사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간적 교황, 가난한 자의 벗, 폭풍우 속의 목자 등의 별명을 붙였다. 그밖에도 그는 교회내부의 잘못을 사과하고 여러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한 매우 개혁적인 교황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프란체스코 교황은 좋은 목회자의 표상으로 남을 것 같다. 세 가지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 2018년 어느 날 어린이들과 만나서 얘기하는 시간을 마련한 것 같다. 교황청 뒤뜰의 장면이라고 하는데, 교황이 낮은 단에 앉아 있고 단 앞의 계단에는 초등학생 저학년이거나 그보다 약간 어린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아마 아이들이 질문하고 교황이 답하는 형식이었던 것 같다. 한 사내아이가 마이크 앞에 섰는데, 말을 못하고 흐느껴 울기만 하고 있었다. 교황이 그 아이를 부르더니, 자기에게만 들리게 말해도 된다고 했다. 아이가 교황에게 다가가 품에 안겨 한참 울더니 귀에 대고 뭔가를 얘기하는 듯 했다.
아이가 내려 간 후에 교황은 아이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며 질문의 내용을 공개했다. 아이의 질문은 이러했다. “아빠가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세례 받도록 했는데, 아빠는 신자가 아니었어요. 착한 우리 아빠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빠를 염려하는 아이의 물음에 대해 교황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이 착한 사람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버리실 분이십니까?” 아이들은 “아니요”라고 합창했다.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태 19:1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 18:3)
둘. 2025년 4월 17일 성 목요일에 교황은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는 해마다 수난주간에는 성 목요일에 교도소나 난민센터, 노인요양원 같은 곳을 방문해서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추는 의식을 가졌다. 올해에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한 달 이상 입원하며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 교황이 집무를 다시 보며 찾은 곳이 교도소였다. 올해 초 가톨릭교회가 202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교황이 희년 선포의 의식을 치른 후에 제일 먼저 찾은 곳도 로마의 교도소였다.
올해 성 목요일에 교도소를 찾은 교황은 힘든 호흡 때문에 작아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왜 내가 아니고 저들이 여기에 갇혔는지 늘 묻게 됩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는 범죄자에게 벌을 주어야 하고, 그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정의(justice)와 의(righteousness)는 다르다.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덕목(civil justice)이고 사회생활의 덕목(social justice)이다. 그러나 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도리(theological justice)이다. 정의는 사람이 정한 법을 지키는 것이지만, 의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이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마땅히 드려야 할 제사이기 때문이다.
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흠이 없을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라…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랴. 내가 흠이 없을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저주하리니 내가 온전할지라도 내 입이 나를 죄 있다 하리라.”(욥기 9:19-21)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아는 자는 자기 자신이 범죄자들과 큰 차이가 없음을 잘 안다. 교황이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에 교도소를 방문해서 한 얘기는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저들을 가둔다면 저도 가두셔야 할 겁니다. 그러나 저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 저들도 용서하심을 저는 압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사람을 심판하지만 교회는 사람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곳이다. 세상 법정은 사람을 가두지만 교회는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곳이다. 정의를 실현하는 세상 법정도 필요하지만, 교회는 죄인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점을 알리는 곳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증오하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곳이 교회이다. 증오는 사람을 죄의 노예가 되게 만들고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자신의 마지막 시간에 교도소를 방문함으로써, 주님의 교회의 대표로서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린 것이다.
교황의 교도소 방문은 예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선포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누가복음 4:18)
그러고 보니 프란체스코 교황은 은혜의 해 곧 희년의 부활절을 지내고 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셋. 2014년에 교황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 때에 그가 한 말, “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한국은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한창 커가는 중학생 아이들이 물에 수장된 사건. 다시 떠올리기조차 힘든 그 사건이 치유되기는 커녕 정치 문제로 비화되어서 나라가 갈라져 싸웠다.
천주교 대회가 광화문에서 있었고, 그곳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천막을 치고 농성 중이었다. 교황은 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세월호 아이들을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리본을 떼는 게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한국사회의 정파적 싸움에 휘말릴 것을 염려한 말이었을 것이다.
방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교황이 말했다. “누군가가 내게 리본을 떼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없습니다.”
교회는 정치 싸움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누구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 다만 교회는 하나님 편에서,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한 교황의 행위는 특정 정파의 편에 선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에 선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병자와 슬퍼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그래서 길에서 구걸하던 바돌로메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물가에서 삼십 팔년 동안 고생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 날 저녁을 지낸 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이었다.
조선시대에 박해를 당한 천주교인들의 시복식을 위해 한국에 온 교황은 목자로서 이 땅의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 자식을 잃은 고통 앞에서 정치권이 좌냐 우냐 중립이냐를 논할 때에, 교회는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한다. 그것은 정치와 다른 영역인 종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정치적으로는 보수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의 조국인 아르헨티나에는 진보주의 신학인 해방신학이 크게 유행했는데, 교황은 젊어서부터 해방신학에 동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는 해방신학과 무관하게 늘 고통 받는 자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나아갈 길이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의 청빈함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하려는 그의 목회철학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는 권위주의적 행보를 내려놓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전통적인 교황의 거처를 거부하고, 일반 사제들의 기숙사를 거처로 사용했다. 바티칸 건물의 일부는 노숙자들의 숙소로 제공되었다. 한번은 대중 앞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성직자가 고급승용차를 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낮은 자들,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려는 그의 목회자적 자세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처절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말하는 것은 정치에 물들고 찌든 사람들의 태도이다. 교회는 정치와 대중을 압도하는 사랑의 영성과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고통 받는 자의 옆을 지킬 수밖에 없다. 교회는 헤롯의 교회도 아니고 빌라도의 교회도 아니고 에수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교황은 교회가 할 일이 무언지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