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엠마오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낙담하여 시골로 낙향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신 일이다. 제자들에게 나타나 길을 가며 얘기하시던 예수께서 날이 저물자 그들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셨다. 빵을 들어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줄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았다. 예수께서는 사라지시고 제자들은 뜨거운 마음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누가복음 24:13-35)
예수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베푼 것은 성찬식이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성찬식을 가졌고, 부활하신 후에도 성찬식을 가진 셈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앞뒤로 성찬식이 있는 셈이다. 이후로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세례식과 함께 가장 중요한 성례전(sacrament)으로 삼고 있다.
고대 인류는 희생제물을 신에게 바친 후에 피는 제단 주변에 뿌리고 그 고기는 나누어 먹었다. 희생제물을 드리고 나누어 먹는 행위는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하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런데, 가축을 희생 제물로 드리기 전에는 사람을 제물로 삼았다. 식인풍습은 제물로 바친 사람을 나누어 먹었던 희생제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말하자면 식인풍습은 공동체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종교의례였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기독교의 성만찬 의식을 식인풍습의 연장선에서 이해했다.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를 각각 자신의 살과 피라고 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아들들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아버지를 살해한 후에 나누어 먹은 폭력의 시각에서 성만찬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만찬은 폭력과 정반대의 행위이니 곧 비폭력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사회 내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한 자연선택이 희생제물의 피를 바치는 자연종교였고, 결국 제사의식은 제물의 피로 공동체 전체의 큰 피흘림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 점에서 자연종교의 희생제사는 일종의 평화의 도구였다. 그러나 희생제물을 드려서 생기는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니,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제물의 희생은 밤낮으로 계속되어야 했다. 인신공양과 동물희생이 사라진 후에도 인간사회에서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폭력을 막고 평화를 이루며 공동체의 결속을 꾀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이 무고한 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만찬은 더 이상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 평화를 이룰 방도를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졌으므로 더 이상의 희생양은 필요 없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자기를 드렸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그 점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브리서 7:27)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을 잡는 일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비폭력의 선언이다. 그것은 진화의 과정 중에 이루어진 자연선택과 단절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선언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가톨릭에서 화체설을 주장하고, 마르틴 루터가 공재설을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빵을 가르는 순간에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를 들고 축사하는 순간에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화체설(transformation theory)이다. 마르틴 루터는 성만찬의 빵은 빵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요, 포도주는 포도주로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라고 설명한다.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적으로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공재설(coexistence theory)이라고 부른다.
화체설이나 공재설은 성만찬을 통해 성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가 되는 신비한 연합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몸이 하나됨으로 마음도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성만찬에는 신비주의 차원이 들어 있다. 기독교의 신비주의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은 그분의 뜻과 하나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의 복을 기원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요한복음 20:19)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평화를 세상에 나누어 주라는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시작한 일도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는 피를 흘려서 이루는 평화가 아닌 새로운 평화의 시작이다.
성만찬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평화를 구현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새 평화를 누리는 존재론적 사건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새로운 평화를 구현하겠다고 다짐하는 의지적 사건이다. 그리하여 성만찬은 폭력적 평화가 아닌 비폭력의 참된 평화가 이루는 새 세상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사건이기도 하다.
사진 1. 이탈리아 라벤나의 상 비탈레 교회(6세기)의 모자이크 벽화.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물로 바치는 장면.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2. 아브라함이 천사들에게 빵을 대접하는 장면. 성만찬의 빵 곧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