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잠언 3장의 말씀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3:5-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는 구절 뒤에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임을 의미한다. 자기가 무얼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성서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와 일치시킨다.

사도 바울 역시 말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리라.”(고린도전서 8:2,3) 무얼 안다고 생각하는 것 대신에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얼 아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데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같은 것이다. 경외란 하나님의 초월성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사랑은 나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두고 말한 것이다. 경외심은 인간의 교만을 막고, 사랑은 인간의 절망을 막는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일어난다. 경외심은 하늘에 계신 전능의 하나님에 대한 감정이고, 사랑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삶을 겪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에 대한 친근한 감정이다. 경외심은 성부에 대한 것이요, 사랑은 성자에 대한 것이니, 경외심과 사랑은 성령 안에서 통합된다. 통합이란 경외심이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을 가리키고, 또한 사랑이 경외심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혜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자기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그때그때 하나님의 지혜를 빌리게 된다. 나를 비우고 하나님의 것을 사용하면 되니, 신앙인은 하늘에 보화를 쌓아둔 자이다. 이 땅의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갖다 쓴다. 지식과 지혜를 내가 소유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과 몸이 가볍다. 그때그때 내가 골몰하여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가져다 쓰면 되니, 고단하지 않다. 그래서 성서는 “그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고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곧 건강 비결인 셈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수행하게 된다. 계명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언지를 알려 준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도 계명과 법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멋대로 해석하는 인식의 왜곡을 막기 위해서이다. 성서에 나오는 계명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신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이끄는 지를 보여준다. 계명에는 우리의 자연본성을 거스르는 일들이 많은데, 그런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하게 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 사랑은 신앙의 완성이다.

고대 사회에서 지혜는 통치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었다. 지식은 지혜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며 왕의 주변에 최고의 지식인들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왕은 그들에게 배우며 스스로의 지식을 늘리고 지혜를 가져야 했다. 그러나 최고의 지혜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남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으며(신명기 17:20), 지혜를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야말로 최고의 지혜로 통치할 수 있게 된다.

성서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찬양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솔로몬은 왕에 즉위하면서, 스스로를 어린아이처럼 어리석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주께서 종으로 하여금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알지 못합니다. 주의 종이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에게 분간하는 마음을 주사 주의 백성을 다스리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수 있게 하소서.”(열왕기 상 3:7-9).

유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덕목 중에 지혜(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설명되는데,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으로써 솔로몬이 구한 ‘분간하는 마음’(discerning heart)과 같다. 지혜는 흔히 말하는 지식과도 달라서 개체 사물에 대한 분석으로 얻어지는 앎이 아니라 전체의 조화와 질서를 만드는 능력을 가리킨다. 전체를 살려야 개체가 살기 때문인데, 사회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악한 부분을 제거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기 위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때에 옳고 그름은 도덕적 선악과 일치하지 않는다. 나라 전체가 위험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때로는 악을 사용해서 더 큰 악을 막아야 될 때가 있다. 그때에는 순진한 선보다 악을 사용하는 일이 사회 전체를 위해 맞다. 상황에 맞는 것이 옳으며, 순수한 선을 고집하다가 악에게 당하면, 그것은 사회 전체를 위해 그른 일이다. 통치자와 정치이성의 옳고 그름이 그런 것이며,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지혜가 그런 것이다. 따라서 정치의 세계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귀하게 보는 종교의 세계와 다르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놔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일은 정치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정의론에서 한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칸트 윤리보다 실용적인 공리주의 윤리가 대세를 이루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정치의 세계는 정치의 논리로 돌아간다. 기독교는 정치 세계가 교회와 별개의 독자적 영역으로 인정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루터와 칼뱅에 이르기까지 두 왕국설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그런데, 정치이성이 무모한 권력의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좋은 정치에는 사랑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견제가 없으면 정치는 인간을 지배하고 탄압하는 권력의 잔치로 흐른다. 그래서 유교에서 중시하는 인의예지의 덕목에서도 인(仁)이 맨 앞에 나온다.

기독교는 정치를 견제할 사랑과 의의 덕목을 제도화했다. 교회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정치논리에 휩쓸려 무고한 자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교회는 정치이성과 다른 종교이성으로 정치를 지도하고, 정치이성의 발전을 이끈다. 종교이성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권위를 가질 때에 힘을 발휘한다. 인간사회가 한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회 전체의 안전과 질서가 유지되려면 교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지혜를 하나님에게 구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전체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길이다. 신명기 17장에는 왕이 해야 할 일로 자신을 남보다 낫게 여기지 않는 것을 꼽았는데(17:20), 이것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지 않고 지혜를 하나님에게 구하는 솔로몬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한 개인의 삶을 구원하는 길일 뿐 아니라, 정치이성의 완성이기도 하다. 종교적 신앙과 정치 이성이 통합되는 일, 그것은 세상을 구하는 길이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한 통합을 위한 영감을 전하는 일이 바로 교회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