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유명하다. 톨스토이나 간디 같은 비폭력 운동가에 영감을 준 구절로도 유명하고,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신랄한 비판의 표적이 된 구절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도 그와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산상수훈의 계명과 달리 단도직입적이지 않은데, 그래서 뭔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씀들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갑자기 뭔가 엄청난 과제가 주어지는 느낌인데, 구약의 계명들은 뭔가 친근감이 느껴지는 말씀들이다.

출애굽기 23장 4,5절의 말씀이 의미심장하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는 가축은 그냥 놔두면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침 원수의 소유물이라면, 길 잃은 가축을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농촌 사회에서 가축은 엄청나게 큰 재산인데, 원수의 재산이 축나는 것은 신나는 일일 수도 있다. 손에 피를 안 묻히고 못 본 척 지나가는 수동적 행위를 통해 원수에게 손해를 미친다. 아무 일도 안하고 원수 갚는 효과를 낼 수 있으니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성서는 원수 갚는 길을 막아선다. 그렇다고 원수를 갚지 말라는 일반적 계명을 선포하지는 않는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문하지도 않는다. 다만 원수의 소유물, 그 중에서도 산 짐승을 꼽아 말한다. 원수의 것이라도 길 잃은 짐승을 보면 그것이 들짐승에게 잡아먹히도록 놔두지 말고, 그 주인인 원수에게 데려다 주라.

성서는 인간에게 있는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 같다. 유학에서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고 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 차마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다. 원수는 밉지만 소나 나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원수의 소유라 할지라도 불쌍한 짐승에게까지 박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인간에게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을 이용해서 성서는 원수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유도한다.

성서는 불쌍한 짐승을 매개로 인간관계의 화해를 도모한다. 원수의 얼굴을 맞닥뜨리면 복수심이 불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서 길 잃은 짐승을 맞닥뜨렸을 때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발동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원수에게 선을 베푼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서 먼저 선의가 생겨나면 날선 인간관계는 누그러질 수 있다. 선의를 받는 사람보다도 선의를 베푸는 사람 쪽에서 이미 화해는 시작된다. 짐승을 데리고 원수의 집으로 가는 길은 화해와 평화의 길이다.

물론 짐승을 돌려받는 원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다. 아주 왜곡된 사람이면 오히려 화를 낼 수도 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부담을 느끼고 미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원수가 베푼 은혜는 오죽하랴.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화해의 싹이 생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상대의 선의를 받지 않고도 먼저 선의를 베푼 사람에게 생긴 화해의 힘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선을 베푼 사람이 선을 주도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적이 사라지니 몸과 마음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수의 길 잃은 짐승을 그에게 데려다 주라는 계명. 이 계명은 지혜문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웅적인 결심을 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저절로 생겨나는 마음바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촌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축을 매개로 삼아 사회의 평화를 도모하는 점에서도 지혜로운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사람 사이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를 까닭 없이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 자의 나귀가 무거운 짐에 눌려 쓰러져 있을 때에, 성서는 나귀가 멘 짐을 덜어주고 부추겨 다시 일으켜 세우라고 명령한다. 아마 그 주인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사태일 게다.

나귀를 돕는 일은 나를 미워하는 자를 돕는 일인데, 그렇게 할 까닭이 있을까. 그를 돕는 일을 하지 못하지만, 불쌍한 나귀를 돕는 일은 불인지심에서 우러나온다. 산 짐승이 고통을 당하는 일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쓰러진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통해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물론 나귀를 보면 그의 얼굴이 떠올라 돕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성서는 나귀를 일으켜 세우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 명령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는 게 아니라 망설임을 제거하는 명령이다. 인간 마음속의 선이 증오와 미움에 의해 파묻히지 않고 선의 잠재력이 현실이 되도록 이끄는 명령이다. 쓰러진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대단한 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작은 일을 통해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는 큰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계명은 생활 속의 작은 일을 통해 큰 선을 도모하는 지혜문서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작은 일을 통해 구약성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게 이끈다. 그 평화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의 큰 차이이다. 신약성서의 말씀은 인류 전체를 구원할 평화의 진리를 말한다. 인류라는 종의 새로운 탄생을 이끈다고 할 만큼 혁명적인 말씀이 많다. 그러나 구약의 계명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은 일을 통해 평화에 다가가도록 만든다. 구약의 가르침도 평화와 관련해서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다.

원수 관계의 개선과 관련해서 구약의 계명이 지혜문서에 속한다는 것은 잠언 24장에서도 볼 수 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 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17,18)

원수가 무너지는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마음(人之常情)이다. 그런데, 성서는 원수의 불행을 고소해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런 명령의 근거가 재미있다. 원수의 불행을 보고 좋아하면, 하나님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그의 불행을 거두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원수의 불행을 좋아한다면 원수 관계는 청산되지 않는다. 증오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 증오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원수의 무너짐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시키는 계명이다. 겉으로 볼 때에 그건 대단히 큰일이 아니다.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아니고, 원수에게 선을 베푸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을 막는 일은 쉽지 않다. 증오하던 자가 거꾸러지는 일을 보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매우 힘든 일이다.

성서는 감정의 흐름을 막기 위해 하나님을 개입시킨다.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면 하나님이 그 불행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노를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은 불행이 원수로부터 내게로 옮아질 수 있다는 얘기이다. 남의 불행을 보고 좋아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는 것이다. 원수의 불행도 한 인간의 불행이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을 원치 않는 분이다.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불행을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결합된 신학으로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감정의 흐름을 억제한다. 그렇게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원수 관계의 청산을 위한 길을 연다.

이 계명 역시 지혜문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원수의 불행을 좋아하면 내게 손해가 된다는 식으로 설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의 결과를 묻지 말고 오직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라는 의무론적 정언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 내게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구약성서는 말한다. 무너진 것 같은 원수가 회복되는 건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불행이 내게로 옮겨온다면 끔찍한 일이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수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은 증오감정에 속하고, 긴 안목에서 보면 증오를 지속하는 일은 내게 좋을 게 없다. 나를 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집단적 증오심에서 힘을 얻는 것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공동체를 상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증오심을 버리는 일은 결과적으로 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길이다. 성서는 원수에 대한 증오심을 버림으로써 개인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도록 유도한다. 건강하게 만드는 게 구원이다. 구원(salvation)이라는 서양말은 건강(salut)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잠언 24장의 계명은 일종의 타부이다. 원수의 재앙을 보고 좋아하면 그 재앙이 내게 미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과거에 인류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타부를 만들어 내었다. 타부는 증명되지 않는 일종의 믿음의 체계인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옛 사람들의 타부에는 어처구니없는 것도 많다. 그러나 원래 타부는 폭력이 전염되어 모두가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 지혜로 작용했다.

성서는 재앙을 막기 위한 자연종교의 타부를 넘어 선의 확산을 도모한다. 다만 타부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타부와 같은 믿음의 계명을 설정한 것이다. 하나님을 들어 위협한다. 원수의 재앙이 내게 옮겨 올 수 있다고 믿는다면, 원수의 재앙을 보고 좋아하는 반사적 감정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증오의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평화를 주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반복과 증오의 악순환을 끊을 단초를 만들려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은 자연종교의 자연 선택적 타부와 신약성서의 계시적 가르침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문서의 위치가 바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