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구약성서의 중요한 본문들이 다섯 번의 전쟁 패배에 대한 성찰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첫째는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남북이 분열된 직후부터 두 나라 사이에 잦은 전쟁이 있었다. 열왕기에는 유다 왕 아마샤가 북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패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유린당하며 유다인 일부가 전쟁포로가 되어 북쪽 사마리아로 끌려간다(열왕기하 14장). 둘째, 북 이스라엘이 다마스커스의 아람 왕에게 패하여 국력이 쇠한 사건이다(열왕기하 12, 13장)

셋째, BC 722년에 있었던 아시리아 제국의 침공이다. 이때에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백성들은 아시리아 제국으로 강제 이주되어 흩어진다(열왕기하 17장). 넷째는 BC 700년에 유다의 제2의 도시인 라기시가 함락되고 유다인들이 이방지역으로 유배된 사건이다. 이 전쟁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다섯째는 BC 587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사건이다. 이때 온 유다와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유다 왕과 귀족과 장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열왕기하 24장).

이사야는 BC 8세기에 남 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쪽 유다 왕국의 존립을 위협할 때이다. 유다의 웃시야 왕부터 히스기야 왕 때까지 활동했다.

선지자 이사야의 경고는 부도덕한 종교집회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온갖 욕심과 야심과 더러운 속마음을 가지고 성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하나님은 역겹게 여기신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제물을 들고 모이지만, 하나님은 제물에 굶주린 분이 아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거짓말하지 말라. 손을 뻗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고개를 돌리시고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 기도하는 손에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17)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케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배에 대한 열심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힘 있는 자들이 약자들을 밥 먹듯이 먹고, 고아와 과부처럼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억울한 일을 만드는 사회는 하나님의 분노를 살 것이다. 남을 해친 피가 묻은 손으로 기도하는 자들은 위선자들이다. 그들의 기도는 자신들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망하지 않고 살고 싶으면 당장 악을 멈추고 정의를 행하며,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1:16,17).

선지자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열심히 모여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고 사람을 억압하는 일을 멈추라는 것이다. 결국 외침의 위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성의 회복이다.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서로 해하고 싸우는 일을 멈추고 서로를 귀하게 알고 존중하면서 어울려 살아간다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국주의의 힘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어차피 힘으로는 아시리아를 당할 수 없다. 아시리아는 이라크 북부를 기점으로 이른바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제패한 대 제국이다. 역사가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아시리아로 꼽는다. 제국이란 수많은 이민족을 통합해서 하나의 통치 질서 밑에 둔 체제를 가리키며, 제국의 건설을 위해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수많은 젊은 군인들의 죽음과 민간인들의 살육이 수반된다.

변방의 작은 나라 유다가 아시리아를 군사력으로 당할 수 없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와 조공관계를 맺고 목숨을 부지하다가 호세아 왕이 특사를 이집트로 보내 원군을 요청한 것이 발각되었고, 마침내 아시리아 군에게 멸망당하고 민족은 흩어졌으며 수도 사마리아에는 이민족이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열왕기하 17). 위협을 느낀 남쪽 유다의 왕들도 자구책을 구하고자 외교적 방책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까지 정복의 손길을 뻗친 아시리아를 군사력으로 막을 방도는 없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생존이 하나님에게 달렸음을 알렸다. 나라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여 영이 맑아지고, 그 맑은 영으로 공동체의 도덕성이 세워지며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회복되어 믿음의 공동체다운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살 길은 그 길밖에 없다.

어차피 이스라엘은 그런 모습의 공동체로서 선택된 것이다. 세상의 나라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과 권력을 탐하여 서로 싸우고 강자가 약자를 먹어치우는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의 신은 모두 정복의 신이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는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평화의 신이요,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신이요, 서로를 죽이지 않고 공존할 길을 열어준 신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세웠다. 제사장의 나라란 타 민족을 정복할 힘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나라들의 죄가 사함 받아 죄를 청산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지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나의 특별한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5,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 이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제사장의 나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서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나라가 다시 설 것이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 지금이라도 자기 지식을 버리고 서로를 음해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진리에 순종하면 땅을 보존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켜지리라.”(1:19,20)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두 왕국설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인정한다. 교회는 교회의 역할이 있고, 국가는 국가의 역할이 있다. 이슬람의 칼리프 제도와 달리 교회는 정치권력을 탐하지 않고 정치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5세기의 교황 겔라시우스는 국가는 권력(potestas)을 갖고 교회는 권위(auctoritas)를 갖는다고 함으로써 정교분리의 원칙을 세웠다.

국가는 힘을 키우기 마련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증강을 통해 대내외적인 차원에서 국가안보를 튼튼하게 한다. 기독교는 현실주의 시각에서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인정한다. 그런데, 군사력 경쟁은 강대국의 충돌로 이어져 세계를 위험하게 만들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막을 수 없다. 군사력 강화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지만 진정한 안보의 길은 아니다. 오히려 다 같이 망하는 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진정한 세계 평화의 길을 위해 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제사장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회의 역할은 정치공동체인 국가의 역할과 다르다. 국가는 경제성장과 군비확장을 꾀하지만 교회는 영적인 성장과 마음의 정화를 요구한다. 국가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교만을 꿈꾸지만, 교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낮은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사람을 섬기게 만든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장이고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다(잠언 18:12).

국가는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고 약육강식의 자연사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아픔을 헤아린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잠언). 영적 각성을 통해 사람을 해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그 일이 잘 되어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면 나라의 결속력이 강화되고, 그것이 국가 안보의 최고 자원이다. 교회는 나라와 세계의 안보를 위해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국가는 국가의 일을 할 것이고, 교회는 교회의 일을 해야 한다. 국가는 국가의 존재이유가 있고 교회는 교회의 존재이유가 있다. 자기 정화가 없이, 자기반성도 없이, 죄의 회개도 없이, 그저 예배로 모인다고 모여서 목사는 자기 마음대로 떠들며 하나님과 사람을 능욕하고 신도는 헌금내고 기도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런 예배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음을 선지자 이사야는 말한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14)

국가는 국가의 일을 하는데 교회가 교회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 안보를 해치고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는 바로 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버림받을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마태 5:13).

교회는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 소금처럼 맛을 내는 데 그 존재이유가 있고, 탐심과 증오가 가득 찬 이 세상에 절제와 사랑을 심는 데에 그 존재이유가 있다. 짜지 않은 소금은 자리만 차지해서 결국 버려지듯이, 교회가 하나님이 기대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버림받을 것이다. 먼저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아 밟혀질 것이고, 마침내 하나님도 포기하실 것이다. 이사야 선지가가 이스라엘을 향해 전한 하나님 말씀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