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서울 사람들은 한강에 가서 수영하거나, 북한산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1960년대의 이야기이다. 어느 여름날 세검정에 살던 친구 집에 갔다가 산기슭에서 맑고 차가운 물에 온 몸을 적시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세검정은 자하문 바깥이고, 겸재 정선은 근 300백년 전의 자하문 올라가는 길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자하문은 한양의 북소문이다. 정도전이 한양을 설계하고 도성을 쌓아 두른 후에 사대문을 만들어 도성을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로를 열었다. 또한 사대문 사이사이에 원근벽지와 한양을 잇는 통행로가 필요했으니, 그렇게 지은 것이 사소문이다. 사소문 중에는 지금도 서소문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그런데, 원래 사대문과 사소문의 이름은 모두 임금의 통치이념을 담은 유교의 가르침을 담아 지었다. 그래서 서소문의 이름은 덕을 밝힌다는 뜻의 소덕문(昭德門)이었고, 이후에 소의문으로 바뀌었다.
자하문의 정식 이름은 창의문(彰義門)이다. 의를 드높인다는 뜻이다. 지금도 문루 정면에 창의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도전이 처음에 지었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소문이라고 한다. 서소문으로 알려진 소의문은 헐려서 없어졌고, 동소문인 혜화문은 지금 본래 자리에서 빗겨나 서 있는데, 큰 도로를 내기 위해 헐렸다가 199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서 있는 광희문 역시 이전 복원된 것이다.
인조반정 때에 반군이 홍제원 곧 지금의 홍제동에 집결한 후에 창의문 바깥의 계곡물에 칼을 씻었고, 그것을 기념해서 지은 정자가 세검정(洗劍亭)이다. 당시에 지은 것은 아니겠지만 정자는 지금도 계곡 위에 서 있고, 세검정은 동네 이름이 되었다. 이후 반군은 창의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온 후에 궁으로 들이닥쳤으니, 바야흐로 인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창의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니, 인조의 후예인 영조가 1743년에 창의문 문루에 올라 시를 짓고 판각을 걸었으며, 또한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판각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집권에 큰 도움이 된 당시의 노론세력 역시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의 후예들이 많았으니, 조선 후기에 나름대로 태평성대 속의 권력 주체들이 조상을 기리는 여유가 느껴진다. 더구나 인조반정의 주력군은 자신들을 창의군(唱義軍)이라고 불렀으니, 그 후손들이 창의문에 애착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조반정이 잘 된 일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반정(反正)이란 말은 돌
이켜 바로 잡는다는 뜻이니 인조반정에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겠지만, 쫓겨난 임금 광해군에 대해서는 오늘날 새로운 평가가 많다. 그리고 인조 개인의 처지를 보더라도 반정으로 임금이 된 후에 갖은 고난을 겪지 않았는가. 청나라의 침공으로 인조 본인은 지금의 송파 석촌 호수 지역인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서 아홉 번이나 머리를 땅에 박으며 항복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렇게 민족사에 길이 남을 수모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의심 병이 들어 심양에서 돌아온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와 손주까지 살해하는 일을 저질렀으니, 얼마나 비극적 인생인가.
더구나 조선인 수십만이 청나라로 끌려가 종이 되거나 여성들은 노리개가 되는 등의 처참한 일을 겪었으니,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한 통치자로서 인조는 얼마나 자신을 비참하게 여겼을까.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진 군주라면, 자기 고통보다 자신의 무능으로 피해를 본 죄 없는 인민의 고통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일으켰을 테니 말이다.
반정에 성공한 조상들이 통과한 문이라 하여 그 후손들이 창의문에 대해 애착을 가졌겠지만, 나는 정치와 무관한 자하문이라는 이름이 더 좋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도 늘 자하문이라고 불렀다. 세검정 지역은 자하문 밖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지금도 그림 속 고개 마루에 서 있는 저 문이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게다.
창의문을 자하문으로 부른 까닭은 창의문에서 내려다 본 경치가 개성의 자핫골과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성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주 빛 노을이라는 뜻인 자하(紫霞)라는 말은 창의문 일대의 풍경을 나타내는 데 꼭 맞는 말이다. 지금은 빌라 촌이 되어 있지만, 겸재의 그림이 잘 보여주는 대로 조선 시대에 창의문 밑으로는 바위와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있었다.
맑은 날 저녁에 서울 서쪽의 인왕산 하늘 위로 붉은 노을이 펼쳐지면, 백악산(북악산) 바위절벽과 인왕산 동쪽 기슭의 암석들과 나무들이 붉은 빛으로 물들며 선경을 이루었을 것이다. 노을이 만든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문의 이름을 자주 빛 노을이라고 했을까.
창의문 밑의 서촌과 장동 일대에는 율곡파의 서인들이 대대로 모여 살았다. 그들은 바위와 숲과 물길 사이사이로 집을 짓고 살았으니, 아침의 안개와 저녁의 노을은 선비들의 기와지붕과 마당까지 채우고 물들였을 것이다. 유명한 송강 정철이 서촌에서 태어났고, 겸재 정선도 지금의 경복 고등학교가 있는 외가 집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청와대 일대에는 서인들의 별장이 있었고, 북악산 밑의 장동은 지금의 궁정동에 해당되는 곳인데, 인조 때에 청 태종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가 청나라로 끌려 간 청음 김상헌의 후예들이 대대로 벼슬을 하며 웅거하고 지내던 곳이다. 조선 말기까지 세도를 잡았던 노론 세력들이다.
그러나 그림 속의 저 문이 창의문이 아니라 대대로 자하문으로 불려 내려온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평가가 분분한 인조반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닐까? 역사의 흐름을 빗겨 서면 우리 선조들에게는 자연이 있었다. 그들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유교의 가르침대로 정치에 참여했지만, 인간사를 벗어나 시간을 초월한 자연 속에서 역사의 허물을 벗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사실 집을 백악산과 인왕산 밑에 짓고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산 속에 산 것이다. 낮에는 궁에 나가 정치를 하지만 밤에는 산속에서 경전을 읽으며 마음을 비우는 것이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자연은 인간사나 역사와 별개로 무심하게 늘 옆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정치란 인간사에 마음을 쓰고 역사를 만드는 일이니, 매일매일 정사를 돌보며 역사에 파묻히면 가까이 있는 자연도 멀어지게 된다. 조선의 정치인들이 산기슭에 집을 짓고 산 것은 한편으로 정치의 때를 묻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인간사에서 묻은 때를 털어보고자 함이리라.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는 역사는 결국 정치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치가 만드는 인간사 곧 역사는 얼마나 애매모호한가. 일들이 꼭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으며,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질서가 재편되면 옳건 그르건 후대는 그 질서 속에 산다. 그러면서 질서를 만든 자들의 행위는 정당화된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 질서의 혜택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을 소유하는 과정에 저질러진 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렵다.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만든 현실 속에서 바른 사람들의 후예는 고생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권세를 가진 자들의 후예는 잘 사는 일들도 많다. 힘이 모든 걸 정당화하는 세상에서 바른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다. 오죽하면 성경에서도 시편의 30~40%는 악한 일을 벌인 자들이 잘 살고 그 후손들까지 혜택을 보는 세상을 한탄하는 얘기로 채워져 있을까. 정의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에 인간은 혼란에 빠져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성경의 탄식시가 탄생했고, 욥기에서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절망하면서 하나님을 왜 믿어야 되는지 묻는다.
그렇다고 역사를 모두 부정할 수 없으니 결국 악인과 의인은 역사 속에서 재평가되고 심판되는 일들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심판이란 말은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을 표현해 준다. 세조 때에 단종 편에 서서 저항하다 죽었던 사육신들은 당시에 역적이었으나 숙종 때에 복권되었다. 고려의 정몽주 역시 조선을 건국한 세력에 의해 역적이 되었으나 세월이 흐른 후에 국가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존경을 받으니 조선의 임금 중종 때에 복권되고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악인들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을 보고 탄식으로 시작하는 시편 역시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명예회복을 확신하며 끝을 맺는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나이다. 내가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한 마리 짐승이오니.”(시편 73:17,22)
그러나 확신은 주관적 믿음일 뿐 꼭 확인되는 사실은 아니다. 그리고 역사의 심판이 있더라도 대개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세상을 떠난 후이니,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의 심판이 있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뒤흔들만한 일들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의 애매모호함(ambiguity)을 말했다. 기독교는 인간 역사를 완전히 포기하는 허무주의나 초개인주의가 아니고,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발걸음으로 보는 헤겔식의 역사주의도 아니고, 역사 속의 인간사를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반지성적이고 무기력한 신앙의 종교도 아니다. 그러하니 일반사람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에게도 절망과 희망, 의심과 믿음이 반복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애매모호한 인간 역사의 덕을 보는 이들과 역사의 희생자들이 섞여 사는 이 세상. 기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이 같이 사는 이 세상. 수많은 사화와 여러 번의 반정을 겪은 조선인들은 역사의 모호함 속에서도 이 땅을 사랑하기 위해 하늘이 준 선물인 자연을 소중히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자연은 역사와 무관하게 역사를 빗겨 서 있는 공간이니 말이다. 창의문이라는 정식 이름대신에 자하문이라는 이름이 유행한 것도 상처 많고 애매모호한 역사의 흐름에서 조금 비켜서서 말없이 점잖은 자연의 위로와 생기를 얻고 싶은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기독교 신앙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선조들의 자연주의적 감각이 역사의 모순을 드러내고 대동(大同) 세상을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우선 유교적 자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나오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은 자연의 자유로움에서 힘을 얻어 스스로 악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고, 자연을 노래하며 역사의 모순에서 헤어 나와 지조를 지키며 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모순된 역사의 수혜자들도 자연을 소재로 시를 지으며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고, 역사의 피해자의 후손들도 조국의 산과 강을 그리며 하늘의 위로를 받고 피해의식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그나마 강대국들의 틈새에서 이 땅을 보존하고 후대에게 소박함과 겸손의 미덕을 지닌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물려주었던 것 아닐까. 조선의 문화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술과 문화를 모두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인지 4학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같은 반 친구가 세검정에 살았는데 하루는 수업이 끝난 후에 세검정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그 친구의 이름과 얼굴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당시에 세검정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니 아마 버스를 타고 갔을 것 같다. 1960년대 중반의 이야기이니 아마 지금 청와대 옆에서 자하문 올라가는 길을 통해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버스가 있지 않았을까.
겸재의 그림에도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길이 그려져 있다. 그 코스가 지금의 창의문로와 아주 비슷한데, 그림 속의 길은 지금의 청와대 옆길 곧 창의문로가 아니라 벽산 빌리지와 경기상고를 잇는 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창의문로는 그림의 길보다 더 오른쪽에 새로 난 길인 것 같다. 겸재의 다른 그림을 보면, 한 선비가 시동을 동행한 채 나귀를 타고 창의문을 오르는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에 비슷한 코스를 버스를 타고 오른 셈이다.
겸재 당시에나 지금이나 길을 오르면서 보이는 풍경은 똑같다. 그림에 창의문 왼쪽으로 기와집 지붕이 보이는데, 서촌과 장동 일대에 살던 이들의 별장이었을 게다. 아마 지금 윤동주 시인 기념관이 있는 곳이 바로 거기쯤 되지 않을까 싶다.
세검정까지 간 것은 지금 생각하면 방과 후에 상당히 멀리까지 놀러간 건데, 어머니 허락을 받은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당시 세검정은 골짜기 마을로서 시골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앵두나무가 많아 붉은 앵두를 따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와 함께 계곡을 따라 올라가 바위 위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 밑에서 물놀이 하며 즐겼다.
십년 쯤 전에 어린 시절에 놀던 곳을 마음먹고 찾아가 보았는데,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창의문에서 상명대학으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 어디일 텐데, 집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지형도 너무 많이 바뀌어서 계곡 자체를 찾을 수 없으며 앵두나무가 많던 지역도 어딘지 모르겠다.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었다는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곳이 좀 비슷하기는 했지만 암반과 높은 암석 절벽들이 보이지 않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많던 맑은 물과 바위산의 풍광이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
그래도 북악산과 인왕산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다. 태종 때에 대대적으로 소나무를 심었다는 남산 역시 제자리에 서 있다. 겸재가 바라보고 그렸던 서울의 산들이 변치 않고 있으니 참 좋다. 언젠가 경복궁 근정전 문으로 들어가면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북악산을 바라보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중국 사신들이 서울의 절경에 감탄했다는 말이 허튼 얘기가 아니다. 사실 베이징은 산도 없고 물도 없는 허허벌판에 세워진 도시이니, 서울만큼 아름다운 자연조건을 갖춘 수도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