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때에 인도에서 수입된 불교가 위진 남북조 시대인 4세기에 이르러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중앙아시아에서 건너 온 구마라집에 의해 중요한 불교경전들이 한문으로 번역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유교와는 완전히 다른 불교의 진리관은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교에 없었던 불교의 내세관은 민중에게 신속히 흡수되었다. 또한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는 측면에서 왕을 곧 부처로 보는 왕즉불(王卽佛)의 사상이 생겨났고, 왕들은 불교를 통해 통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불교는 수나라를 거치면서 화엄종, 천태종, 선종 등의 다양한 교단이 굳건히 자리 잡고 당나라에 이르러 활짝 꽃피게 된다.

신라는 법흥왕 때에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그의 왕위를 이어받은 진흥왕은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나라의 체제를 정비했다. 왕즉불의 사상을 이용해서 신라의 왕은 세상을 구제하는 부처의 권위를 지니고자 했고, 진흥왕은 스스로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통치자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했다. 사실 백제의 성왕(聖王)이라는 이름도 전륜성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불교식 이름이다. 신라의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고, 그 안에 신라 3대 보물의 하나로 꼽히는 금동여래장육존상을 안치했다.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613년) 때에는 백고좌회(百高座會)가 신설되었는데, 전국에서 선발된 백 명의 뛰어난 고승들이 황룡사에 모여 국가를 위한 법회를 열었다. 7세기에 활동한 원효대사는 대단한 천재로 유명하지만 환속한 승려로서도 유명하다. 신라의 불교계에는 파계한 원효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왕이 주관하는 백고좌회에 원효는 초대받지 못하였다.

당시에 신라는 중국과 승려들을 통한 학문의 교류가 빈번했던 것 같다. 『금강삼매경』이란 경전이 신라에 전해졌고, 경전의 풀이를 위해 신라 불교계는 결국 원효대사를 찾아갔다. 그 때 원효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 개의 서까래가 필요할 때에는 나를 찾지 않더니 하나의 대들보가 필요하니까 나를 찾는구나.” 백 개의 서까래는 백고좌회에 참석한 승려들을 가리킨다. 국가적 행사에 초대받은 이들을 작은 서까래에 비유하고 자신을 대들보에 비유한 원효는 그만큼 자신감에 넘치는 인물이었다.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을 불교는 만심(慢心)이라 하여 경계하는데, 진리를 전하기 위한 만심은 괜찮다고 원효대사가 말했다는 얘기가 있다. 겉모습만 번드레한 자들의 자기 자랑에 잘 속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진리의 증언자가 어느 정도 자신의 우월성을 표현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를 염두에 둔 얘기인 것 같다.

어쨌든 원효대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신라 최고의 실력자였고,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에서 존경을 받는 최정상의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원효가 쓴 『금강삼매경론』 은 동아시아에서 매우 귀중한 문헌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은 『금강삼매경』을 풀이한 것인데, ‘론’자가 붙은 것은 불교의 경전에 들어갈 만큼 중요한 문서임을 의미한다.

불교의 경전은 삼장(三藏)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經)과 율(律)과 론(論)이 그것이다. 삼장을 모두 외운 자를 가리켜 삼장법사라고 부른다. 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리키고, 율은 수행규범이나 교단운영 규칙을 가리키며, 론은 경을 풀이한 것이다. 론 곧 논서도 경전에 포함되니, 불교의 경전은 기독교에 비해 그 양이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원효의 자부심은 국내 차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원효가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 물을 먹고 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태여 해외에 가서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유학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원효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실제로 그는 우리나라에 서유기로 잘 알려진 삼장법사 현장의 학설을 비판하는 『판비량론』이라는 글을 썼다. 이것은 당시에 발달된 불교의 인식론을 통달한 가운데에 나온 산물이다. 삼장법사가 원효의 비판을 읽고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뛰어난 학문세계를 보여준 글이다.

이러한 원효의 자부심은 교만이라기보다는 꿋꿋하게 자기의 문화를 만들며 살아가는 자주 정신으로 이해된다. 원효는 삼국통일의 시기를 겪은 사람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소정방의 군사를 한반도에서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원효 같은 큰 사상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가 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군사력 뿐 아니라 정신력이 중요한데, 정신력이란 국민의 결속력과 자주적 정신을 가리킨다. 자주적인 원효의 큰 사상이 신라인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국민을 통합하는 데에 이바지 한 것이 아닐까.

서울의 북한산을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 원효봉이 있고 오른쪽에 의상봉이 있다. 원효봉은 둥글고 널찍한데, 의상봉은 가파르고 뾰족하다. 나는 주로 의상봉으로 많이 올라갔는데, 매우 험악해서 숨이 차다. 의상봉은 우리나라 화엄의 원조인 의상이 진리를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구도자의 길을 상징하는 듯하고, 원효봉은 탈속과 세속을 거침없이 오가는 원융무애(圓融無礙)의 경지를 실천한 원효의 길을 상징하는 듯하다.

1400년 전에 원효는 그 때의 방식으로 이 땅에 자존감을 세웠고,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의 방식으로 이 나라의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원효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자신 만의 멋과 문화를 가지고 살아왔고, 그 결과 현재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루었다고 봐야한다. 큰 나라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되겠지만 영혼까지 팔아가며 사대적 자세를 가지는 것은 얼마나 비굴한가. 교류할 것은 교류하되 당당하게 주체적 자세를 잃지 않으며 자기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오늘날 자주 정신을 잃어버린 채 미국을 추종하는 이들이 우리나라에 많은 것 같다.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과거는 감사하고, 경제적으로 대국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자인 미국과 잘 지내야 된다. 좋은 것은 어디서나 배워야 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까지 따라가며 영혼을 팔아 서는 안 된다.

미제나 일제라면 사족을 못 썼던 시절이 있었으나, 짧은 시간 안에 이제 국산을 최고로 여기며 살게 된 세상을 만든 게 우리의 저력이다. 자존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은 작지만 아름다운 산천을 가진 이곳에서 감사하며 서로 돕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이겨내고, 사랑과 정의를 꽃 피우는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무력한 지도층 때문에 열강의 먹이가 된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나라를 잃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수모를 당했던 경험을 잊으면 안 된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아직 자연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점에서 인간 역사도 자연현상처럼 약육강식의 자연 원리에 따라 반복된다.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서로 묵인한 사실이 있다. 국가는 배타적 공동체이므로,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 우리를 도와줄 나라는 없다. 하나님은 흔들리는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지만, 국제사회는 상대가 흔들리면 꺾고 꺼져 가면 꺼버린다.

한국교회도 조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거의 힘 숭배에 가까워, 정신적으로 자주성을 잃고 미국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정치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종교는 좀 다른 걸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힘 싸움에 빠져 멸망하는 일을 막을 수 있고, 교회가 제 역할을 해야 힘없는 나라와 힘없는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구약성서를 보면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더욱이 힘 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 최대의 패권국이었던 로마 제국의 심판대에서 처형되었다. 세상을 구원할 진리가 제국주의 국가의 권세에 의해 수모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고,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세워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힘 숭배를 이기고 극복한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의미한다.

신앙의 본질을 잊고 교회가 오히려 힘 숭배에 앞장서고 있는 사실은 개탄스럽다. 마음이 온통 대국인 미국에 기울어 있어서 미국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기업인과 지식인들이 모두 미국에 연고를 두려고 애쓰고 있는데, 전쟁이 나면 미국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종교는 대세를 따르지 않으며 의연한 자세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오히려 교인들이 세상 풍조의 선두에 서 있다.

물론 세계 GDP의 25%를 차지하는 미국의 넓은 땅덩어리와 다양성의 문화가 여전히 우리 한국인들에게 기회의 땅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되는데, 영혼 구원을 외치는 교회가 영혼을 힘과 돈이 있는 쪽에 파는 것 같아서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영혼을 팔다가 구한말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 오면 나라를 파는 세력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