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구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고난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요, 또 하나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원은 대개 고난이나 죽음의 위기 같은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출애굽은 대표적인 구원사건이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표현한 것도 그렇고, 원수들의 조롱으로부터 벗어나고 병든 몸이 낫기를 기도하는 시편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성서에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많이 강조된다. 마태복음의 예수탄생 고지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태 1:21)로 묘사된다. 예수께서 세리 삭개오의 집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하심이다.”(누가 19:9,10)고 하셨는데, 여기서 구원은 죄의 용서이다. 평생 부당하게 재산을 모은 삭개오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 쪽의 반응이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원사건이다.

그런데, 성서는 인생의 고통이나 고난이 죄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종교적 사고방식이 그렇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 예수님은 “네 죄가 사함 받았다”(마가 2:9)라고 말씀하셨다. “네 병이 나았다”고 하지 않고 “죄가 사해졌다”고 한 것은 모든 고통의 근원에 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병환자를 고칠 때에도 “깨끗함을 받으라”(마가 1:42)고 하시는데, 그것도 죄로 얼룩진 마음 때문에 몸의 병이 생긴 것으로 보는 종교적 언어이다.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정(淨)하게 되는 것이니,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져 부정(不淨)해진 몸이 정(淨)하게 되면 병이 낫는다.

고통과 고난의 근원에 죄가 있으므로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할 때에, 죄의 힘에 붙들려 있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몹쓸 병에 걸린 사람에게 구원은 그 병이 낫는 일이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병 고침의 핵심은 죄 사함에 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예수님의 행위가 큰 스캔들이 되었다. 고대사회에서 병을 고치는 건 잡신을 섬기는 주술사나 무당들도 하는 일이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에 죄를 사하는 일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그냥 능력 있는 주술사나 대장귀신이 들린 무당 정도로 여기고 싶었다. 바알세불의 얘기가 그 얘기이다(마태 12:24). 따라서, 병자를 향해 죄사함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행위는 그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마가 2:7)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을 말로 선포하는 예수는 그들의 눈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보였던 것이다.

어떻든 예수님은 병고침의 핵심은 죄를 사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셨다. 그런데, 어떤 병자의 병이 죄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의 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죄가 많아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요한복음에서 눈 먼 자를 가리켜 제자들이 물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한 9:1-3)

고대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장애가 당사자나 그 부모의 죄가 많아서 생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을 깨셨다. 인간의 고통이나 고난을 죄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보는 게 성서의 시각이라면, 왜 예수님은 맹인 자신이나 그 부모의 죄를 부인했을까? 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면 그가 보지 못하는 불행을 입은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그의 죄가 아니라 세상의 죄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사유한다. 그래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유전이든지 질환 때문으로 설명된다. 그의 죄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의 우연한 불행을 그의 죄 때문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연한 것은 그냥 우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연은 우연으로 넘길 줄 알아야 하고, 너무 필연적인 죄와 벌의 인과관계를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만일 구태여 죄를 묻는다면, 세상의 죄를 물어야 한다. 맹인의 불행은 세상의 죄와 관련이 있다. 그것이 과학과 다르고 자연종교의 미신적 신앙과도 다른 성서의 사고방식이다. 

성서는 세상의 죄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힘이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다함께 짓는 죄가 있다. 인류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고통과 고난이 그 불쌍한 사람에게 미쳤다. 그리하여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맹인을 죄인으로 취급하거나 저주할 자격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맹인을 보고 죄를 물으려면 자신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죄를 묻지 말고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유를 하든지, 아니면 어떤 사람의 우연한 불행에 대해 연대적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 기독교적 사유방식이다. 

고대사회에서 인신공양으로 바쳐진 대표적 존재가 장애인이다. 남다른 그들의 신체적 결함은 그들을 남다른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제사 때가 되면 공동체 전체가 장애인 중 제물로 바칠 자를 골라 저주하고 욕하고 조롱하며 죽여서 피를 보았다. 평소에 아이들도 장애인을 놀리며 놀았다. 따라서 예수께서 맹인의 죄나 그의 부모의 죄를 부인한 것은 그를 세상의 저주로부터 보호하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보호는 구약성서에도 나온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위기 19:14) 귀먹은 자나 맹인을 저주하거나 괴롭히는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나 하는 짓이다. 그 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고대의 이방종교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맹인이 죄인이 아님을 선포하심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신다. 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세상의 죄의 힘으로부터 그를 해방하는 일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세상의 죄의 힘이 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상대하시면서 한 사람을 구원한다. 구원은 구원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의 죄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상대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차원의 싸움을 수반한다. 세리 삭개오의 구원도 그렇고, 중풍병자를 고친 것도 우주적 차원의 구원의 역사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고칠 때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사도행전 3:6)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나사렛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란 무엇인가? 개인들의 집합이 곧 세상 아닌가? 그러면, 세상의 죄란 실체가 없고 각자의 죄가 있을 뿐 아닌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그들과 함께 죄를 주고받으며 죄를 짓는다. 그렇게 세상의 죄가 만들어진다. 모두가 다함께 한마음으로 짓는 죄가 세상의 죄이다. 다함께 짓는 죄이므로 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각자 의식하는 개인의 죄보다 의식하지 못하는 세상의 죄가 더 크다. 세상의 죄의 힘이 개인을 지배하고, 개인들은 세상의 죄에 연루되어 있다. 세상의 죄는 개인이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점에서 죄의 권세이다. 그것이 사탄의 정체이다. 그런데, 세상의 죄도 결국 개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개인에게 책임이 없지 않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에 예수님은 “네 죄가 사해졌다”고 하신 것이다. 눈 먼 자를 보고 그의 죄가 아니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의 죄를 가리키기 위함이요, 나병환자를 고칠 때에 그의 죄를 사한다고 한 것은 세상 죄에 휩쓸린 개인의 죄도 있음을 말하신 것이다. 예수의 다음 말씀은 세상의 죄와 개인의 죄를 동시에 지적한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마태 18:7)

그런데, 세상의 죄가 개인의 죄에 앞선다. 개인은 죄짓게 만드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죄에 오염되어 죄를 짓는다. 구원이란 세상의 죄와 싸우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는 세상을 지배하는 죄의 힘 곧 사탄과 우주적 차원의 싸움을 싸우면서 개인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마련해 주신다.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죄는 공동체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죄, 세상의 죄가 성서의 관심사이다. 그러므로 구원도 공동체적 사건이다. 혼자 힘으로 세상 죄를 이기기 어렵기 때문에 교회가 중요하다. 세상 죄를 이기지 못하면 자기 죄도 이기기 어렵다. 그러므로 개인구원을 위해서도 공동체의 힘이 필요하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세상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자유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말이다. 자유와 해방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교회의 존재이유가 거기에 있고, 그런 의미로 교회는 구원 공동체이다.

선한 영향력이란 단지 예수 믿는 사람을 늘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세상의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정의를 세워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는 안식일이나 우상숭배 금지, 절기규정 같은 종교법이 공정한 재판과 약자보호의 규정 등 사회윤리에 해당하는 규정과 같이 묶여 있다. 성서는 약자에 대한 착취를 금지하고 가난한 자들이 살아갈 길을 공동체가 마련해 주게 하며, 죄인의 인권을 고려하는 등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으며, 사회정의에 관한 규정들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규정하고 있다. 출애굽기 23장과 레위기 19장, 신명기 24,25장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성서는 정의와 인권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판하셨다. “너희가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 23:23. 그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사회정의에 무관심한 미신적인 자연종교와 다르다. 부당한 재판을 하거나 불의한 재물을 쌓거나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리거나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요, 하나님의 분노와 재앙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구원이란 재앙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세상의 죄의 힘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거짓과 허영에서 멀어지고 정의를 왜곡하지 않으며 사람을 존중하는 일로 연결된다. 교회가 그 점에서 앞장 설 때에 구원 공동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