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야 왜 그 분이 입을 닫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신지 20년 가까이 된 이 시점에서야 나는 그 분의 마음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게는 두 분 스승님이 계시다. 장기천 목사님과 선한용 교수님이다. 두 분 모두 1931년생인데, 선 교수님은 작년에 돌아가셨고 장 목사님은 벌써 십 팔년 전에 돌아가셨다.

장 목사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게 있다. 그 분의 침묵이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입을 닫고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왜 말씀이 없는지 모두가 알 수 없었다. 나뿐 아니라 평생 반려자요 동반자로 사셨던 사모님도 알지 못했다. 물론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어찌 그렇게 단 한 마디도 하시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을 좋아하셔서 예배가 끝나면 사택에 들어온 교인들과 늦게까지 얘기하시고 밥까지 먹여서 보내던 분인데 말이다.

비극은 장 감독님의 은퇴와 함께 시작되었다. 새로운 담임목사로 온 후임자는 오자마자 비리를 저질렀고, 그의 도덕성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었다. 그는 나중에 재판에서 다 드러난 진실까지도 부인했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권위를 내세우며 교인들을 위협했다. 오랜 세월 서울에서 명망이 있던 교회가 통째로 흔들렸고, 담임목사는 장로 몇 사람과 협의해서 서울시 성곽복원 작업에 협조한다는 명목으로 보상금을 챙겨 교회를 수원으로 이전했다. 한국 개신교 역사의 초창기에 설립된 유서 깊은 교회가 그렇게 사라졌다.

그 과정에 장로 몇 사람이 은퇴한 장 목사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임자가 후임자를 험담하고 교인들을 부추겼다고 말을 퍼뜨렸다. 교인들이 장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한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분은 교회문제에 일체 개입하지 않으셨다.

장 목사님은 목회하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고, 설교한대로 살려고 노력하셨다. 그분은 평생 선한 목자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애쓴 분이다. 은퇴하신 후에 집도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로 옮길 정도로 결벽증이 있는 분이었다. 감독회장 재임 시에도 그 분은 좋은 차를 타지 않아 기사분이 자존심 상한다고 투덜댈 정도였다.

교회 분열의 책임을 장 목사님에게 돌렸던 장로들은 미국에까지 가서 후임자를 물색했던 사람들이다. 한국교회에서 후임자 선정으로 잡음이 일어나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전임자인 장 목사님은 후임자 선정에 일체 개입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전임자가 후임자를 모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자칫 장 목사님이 희생양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상황이었다. 장 목사님은 전에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셨다. 그분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기 책임을 면하려고 거칠고 무례하게 거짓을 퍼뜨리며 싸움을 거는 목사들이 있었는데, 장 목사님은 대응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은퇴하신 후 인생의 말년에, 이번에는 목사님을 존경하며 따랐던 장로 중 일부가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장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에 대고 장 목사님에게 욕설을 퍼 부은 것 같다. 목사님은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바로 그 날 이후부터 입을 다무셨던 것 같다. 아마 심한 모욕감을 느끼셨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듯한 충격을 받으셨을 것 같다. 깨끗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명예를 중요시 했는데, 젊은 후임자를 모함이나 하는 사람처럼 소문을 내는데다가, 믿었던 사람한테서 배신을 당했고, 열성을 바쳤던 교회는 분열되어 산산조각 났다.

이 모든 게 후임자의 비리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거짓말 때문이니, 장 목사님은 후임자 선정에 개입하지 않은 자기의 책임이 크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목사님도 모르고 교인들도 모르던 전혀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담임목사로 미국에서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분의 침묵은 배신자에 대한 증오심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실수를 탓하는 자책감에서 생긴 것도 아닌 것 같다. 말을 꺼냈다가는 구차한 변명으로 비쳐지고 진흙탕 싸움으로 들어가 몸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침묵하신 것도 아닌 것 같다.

돌아가실 때까지 몇 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시지 않은 그 길고 무거운 침묵. 그 침묵 속에는 어떤 종교적 차원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은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 아무도 탓하지 않겠다는 결심.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의 난잡함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침묵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평생 설교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분노와 절망감과 자책감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도 그분의 시선은 그리스도에 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도 침묵하시지 않았는가.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마가 15:3-5)

그리스도는 세상과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이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 18:36) 그리스도는 하나의 나라이며,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이다.

세상에는 말이 많다. 할 말이 많기 때문이다. 맘이 통해서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억압과 부조리가 많아서 할 말이 쌓인다. 억압과 부조리가 할 말을 만들고, 부조리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할 말을 해야 한다. 할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고, 할 말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할 말을 하는 데에는 말을 막으려는 세력과의 투쟁이 수반된다.

정의는 투쟁의 산물이고, 정의를 위해서라도 세상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다. 죄와 불의가 만드는 분열이 있고,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분열도 있다. 세상 나라인 국가는 분열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최종적 정의의 이름으로 법의 칼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다르다. 그의 나라는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 곳이 아니다. 죄인도 받아들여지는 곳이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아니, 죄인이라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물론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는 비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벌까지 해야 한다. 그래야 악을 막고 정의를 세우며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정의를 위해 판단하고 심판하며 법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법은 죄인의 몸을 다스리지만 죄인의 영혼은 사람이 손을 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죄인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죄인을 법정에 세우더라도 증오심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모독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건드릴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다. 그처럼 하나님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다. 물론 사랑 때문에 공동체를 해한 잘못까지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악은 세상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사랑이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죄는 심판하되 죄인의 인격은 모독하지 않는다. 죄인의 인격이란 그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칸트가 말한 자율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다.

그 사랑의 영성을 공급하는 곳이 교회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영성이다. 거기에는 하나님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이 수반된다. 그리하여 사랑은 세상에서 생긴 증오심을 뒤로 물리고 하나님 때문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 없이 악을 이기는 참다운 정의를 위한 근원적인 생명력이다. 참다운 정의란 하나님의 의(justitia Dei)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의는 법이 아닌 복음이요, 사랑에 의한 정의이다. 

사랑의 영성을 위해 선악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곳, 그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인간은 서로 정죄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 그 점에서 교회는 분열된 세상의 영과 다른 영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예수께서 말한 “내 나라”가 그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세상 나라 속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교회이다.

세상에서는 말을 잘 하는 게 중요하지만, 교회는 말을 듣는 곳이다. 말의 시작점은 하나님에게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더라.”(요한복음 1:1). 말은 하기 전에 듣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교회로 들어와 입을 닫고 말을 듣는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도 자기 말을 하면 안 되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 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목사가 자기 말을 하면서 아멘으로 화답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교회는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점에서 세상과 다르고,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교회는 목사들의 범죄의 소굴일지도 모른다. 교회의 부패를 참을 수 없었던 마르틴 루터는 사람이 성직자들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만인사제설의 시작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습적 범죄는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죄인들이 북적대는 곳이지만, 그 죄인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곳이 또한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다. 교회에 가는 것은 증오심에 휩싸이지 않는 영성이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 선악 너머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 7:1). 아프고 슬프지만 악을 보면서도 찌르지 않는다. 할 말이 많지만 차라리 말하지 않는다. 남은 감정이 있다면 이렇게 처리한다. “저 사람은 왜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줄까?” 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원래 교회는 순결한 공동체가 아니고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자기도 그 죄인의 한 사람으로 교회에 속한다.

그렇게 마지막 시간동안 장 목사님은 자기가 평생 목회한 교회에 대한 예의를 갖추셨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잃지 않으셨다. 그 분의 침묵은 마지막 시간에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신”(누가복음 23:9) 그리스도의 침묵을 닮았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그렇게 그분은 악을 이기는 영원한 길을 따르셨다. 몇 년 동안이나 단 한 마디 하시지 않은 그 분의 길고 무거운 침묵. 나는 이제야 나의 스승이신 그분의 침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얼마나 미련한 제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