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과 유생의 대결』(한승훈 저)이란 책을 재밌게 읽었다. 저자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우상파괴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상파괴는 구약성서의 핵심용어이자 신학의 용어이고, 종교개혁은 거의 16세기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이는 말이다. 저자도 아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우상파괴와 종교개혁이 서양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어났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한국의 신학자로서 책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1992년에 북한의 개성에서 왕건 동상이 발견되었다. 고려의 시조인 왕건의 능을 확장 공사하던 중에 발견된 것으로서, 남한 언론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기억이 있다. 발굴된 동상은 겉에 입혔던 의복은 사라지고 알몸 형태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왕건의 청동상은 조선의 임금 세종 때에 땅에 묻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유교의 나라로 개국한 조선은 태종 때에 국가의례를 새로 마련하고 전국의 신상을 없애기로 했다. 그것은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의 요구를 따른 면도 있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명나라 보다 더욱 철저하게 성상파괴의 원칙을 시행했다.

고려는 적어도 네 명의 왕을 신상으로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왕의 신상은 개성의 봉은사(奉恩寺)에 모셔졌는데, 봉은사란 말 그대로 은총을 구하고 감사하며 받드는 절이란 뜻이다. 현재 강남에 있는 봉은사 역시 옆에 있는 조선의 임금 성종과 중종의 능을 관리하는 왕실사찰로서 같은 기능을 담당했다. 죽은 왕을 신으로 받드는 것 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전국방방곡곡에 신이 많았고, 신들은 신상으로 만들어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산에는 산신이 있고, 곳곳에 성황신이 있었으며 집안에도 구석구석 신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신들은 오래된 자연종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절에 있는 불상은 신상이 아니지만 민중들에게는 영험한 기운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며 태종이 고려시대에 난립했던 국가지원의 사찰들을 대폭 축소한 것은 고려의 국교라고 할 수 있었던 불교의 자리에 세계관이 전혀 다른 유교가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절이 소유한 토지의 크기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세금도 내지 않아 국가재정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온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급기야 도성에서 절을 쫓아내기까지 하게 된 것은 불상에게 소원을 비는 미신적 신앙을 배척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고 봐야한다. 산속으로 밀려난 절에는 산신과 북두신과 독각신을 모시는 삼성각(三聖閣)을 따로 세워 놓았는데, 이것은 불교와 토착종교가 혼합된 형태의 신들로서 민중들이 마음 놓고 신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자리를 절이 마련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이 있는 곳을 신위(神位)라고 하는데, 신위는 장소일 수도 있고 방위일 수도 있지만, 신위를 형상화할 수도 있으니, 그것이 곧 신상이다. 나무나 흙으로 만든 신상은 빌고 받들 대상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간절한 마음의 초점을 맞추게 하는 데에 제격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서 하늘과 통하는 자로 인식되었고, 죽으면 신으로 받들어졌다. 고려시대의 왕의 신상은 그런 인류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와 무교를 모두 배척하면서 출발한 인문주의의 나라 조선은 고대 이래로 내려오던 종교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개성의 봉은사에 모셔져 있던 고려왕의 동상을 처분하려고 했고, 그 방식이 땅에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종임금 때에 묻었던 동상이 20세기 끝 무렵에 발견된 것이다.

조선은 죽은 왕의 신상을 만드는 대신에 위패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종묘에는 왕의 신상들이 없고 신의 이름을 적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죽은 자의 위패를 모시는 것은 사대부집안에서도 이루어졌고, 서민들도 제사 날에는 종이에 신위를 적어 놓았다. 왕이든 서민이든 죽은 자의 신위를 모시는 것은 인류의 오래된 조상신 숭배와 유교의 효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왕의 경우에는 고대부터 하늘과 통하여 천지의 신묘한 질서를 만드는 중심의 힘으로서 숭배되어 죽어서도 신성시 되었고, 그리하여 묘(廟)라는 이름을 붙여 왕들의 위패를 모시었던 것이다. 왕들을 제사 지내는 태묘(太廟)나 종묘(宗廟) 외에도 공자를 모신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부르는데, 이는 천지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덕을 밝혀 문치(文治)의 세계를 연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이라고 부르며 기리는 곳이다. 종묘나 문묘나 국가의 안위와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신상은 파괴했더라도 신위를 모시고 은총을 구한 것을 보면 유교가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고 기원하는 종교적 신앙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중국의 황제가 태산에서 봉선제를 통해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명나라의 영락제와 고려의 왕들이 원구단에서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선의 왕은 원구단의 제사를 포기하고 종묘사직에게만 제사를 지냈으니, 사직은 땅의 신과 곡식의 신을 가리킨다. 가물 때에는 기우제를 드렸다. 물론 그런 기원제들은 국가의 대사를 위한 것이고 개인적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신의 힘에 의지하는 종교적 신앙심은 윤리교육을 통한 합리적 통치 질서를 확립한 유교국가의 지도층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 서민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불안하고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재앙을 막고 행운을 비는 종교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죽은 자를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것 역시 종교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지도층들이 신상을 없애고 종교를 도성 밖으로 몰아내더라도 신을 섬기고 소원을 비는 민중의 종교행위를 없앨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무당의 굿이 금지되었다고 해도, 성문 밖만 나가면 당집이 있어서 일 년 내내 굿이 열렸으니, 한 예로 시체가 나간다고 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린 광희문 밖에는 당집이 많이 들어서 망자를 위한 굿이 열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신당동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곧 새로운 당집이 많이 생긴 곳이라는 뜻이다. 지방에서는 여전히 성황당에서 성황신을 섬겼고, 마을마다 무당이 있어 민중의 사제로서 질병과 삶의 애환을 치유하고 죽은 자의 원한을 달래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화해시켰다.

사실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세종 이후 성종 대에 이르러 성상파괴의 원칙은 더욱 확고해지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태조 이성계 때부터 왕궁 안에 모셔져 있던 불상을 없애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고, 세종은 한편으로는 아버지 태종이 마련한 규례를 따라 신상의 제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어머니 원경왕후가 아프자 사람을 시켜 불당의 약사여래상 앞에서 치유를 빌고 도교식의 기원제도 드리게 했다고 한다.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소격서를 설치해서 하늘의 달과 별에게 제사지내게 한 것도 오래된 민중 신앙을 국가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남원 부사인 송상인이 그 지역의 무당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는데, 어느 날 송상인의 죽은 친구를 빙의한 무당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고 한다. 친구의 얘기를 무당이 전하자 송상인은 친구를 그리워하며 몹시 울었고, 그날 이후로 명을 거두고 무당의 제거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전해지는 것은 양반 사대부들조차 삶의 다양한 위기 앞에서 신에게 의지했음을 보여준다. 인생사의 문제는 합리적 사유와 도덕적 실천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정왕후 섭정기의 윤원형이 백 여 개의 신상을 만들어 놓고 소원을 비는 자들에게 시줏돈을 거두어 부를 축적한 사실 역시 복을 비는 신앙이 사대부들에게도 여전히 왕성했음을 알려준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신상들이 완전히 철거되지 않았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1566년에 유생들이 개성의 산으로 몰려 올라가 산당에 모셔져 있던 신상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부수었다. 고려시대에는 무속 계열 뿐 아니라 공자와 그 제자들도 신상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건 중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1574년에 유생들이 개성의 성균관으로 몰려가 그 신상들을 모두 부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가르침이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 창의적으로 정리되고 세속풍습을 교화해 감에 따라서 조선 중기 이후로 우상파괴 운동은 전국 곳곳에 퍼져갔던 것 같다. 중종 임금은 경주에 널려 있는 불상을 부수어 무기를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경주 남산의 목잘린 불상들도 이때의 일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짐작한다. 19세기 말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신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놀랐다는데, 그만큼 유교의 나라 조선은 성상파괴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조선은 신에게 의지하는 신앙을 혹세무민으로 여겨 멀리하고 무당을 천시했으며 성리학의 도덕 형이상학에 근거한 합리적 사유를 실천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18세기 후반에 천주교에 반대한 공서파(攻西派)들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허무맹랑한 교설로 간주했다. 그들은 악한 자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교리가 의리를 어지럽혀 국가의 해악이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유교에서도 믿음을 중요한 덕목으로 본다. 공자도 믿음을 중요시했는데, 그는 믿음을 가리켜 앞에서 끄는 소와 뒤의 수레를 잇는 고리라고 했다. 소의 힘을 이용해서 수레가 앞으로 가려면 소와 수레를 잇는 고리가 필요하다. 그 고리가 믿음이라면 결국 믿음은 천지를 조화롭게 운행하는 천기를 힙 입어 선을 실천할 수 있는 통로이다. 그리하여 한(漢) 나라에 이르면 맹자가 말한 인의예지의 네 가지 덕목에 믿을 신을 포함하여 5상(五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의 믿음은 세상만사가 결국은 진실이 이기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도덕적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에 인간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천리를 따라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 점에서 유교는 칸트가 말한 도덕종교와 같다. 그러므로 유교의 믿음은 곤경에서 벗어나고 복을 받기 위해 신에게 기도하고 비는 그런 종교적 신앙과 다르다. 조선 후기에 안정복과 신후담 등의 공서파들이 천주교를 공격한 것은 그런 도덕적 관점 곧 실천이성의 관점에 근거한 것이다.

기독교의 우상파괴는 조선의 유교와 달리 합리적 인문주의로 종교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로 옛 종교를 대체한 것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자연종교를 계시종교로 대체한 것이다. 구약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상은 인간이 만든 거짓 신이고 하나님은 살아 있는 신이다. 우상파괴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우상파괴주의(iconoclasm)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약에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반복되고, 이스라엘의 개혁은 언제나 우상파괴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성전주의를 비판하는 복음서의 말씀과,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 앞에 놓인 제사음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바울의 말씀에서 기독교의 우상파괴주의는 미신적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자유 운동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한 번 성상파괴 운동을 벌임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근대 세계를 연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로 연결되는 까닭은 성서와 기독교의 우상파괴주의가 인간숭배의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우상파괴는 하나님을 절대 초월자로 믿는 믿음의 산물이며, 그 결과 모든 종류의 인간 숭배를 거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인간숭배의 거부란 정치권력의 비신성화, 정치 메시아니즘의 거부, 사제와 평신도의 이분법에서 비롯된 신분제도의 철폐, 권위주의의 철폐와 자유주의 전통의 확립, 그리고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극복 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사회구원의 정치적 종교인 것만은 아니며 개인구원 역시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매우 고상하고 높은 수준의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삶을 위로받고 초월적 힘에 의지해서 재앙을 막고 복을 구하는 소박한 신앙심을 포함하고 있다. 누구나 개인구원의 문제에서 신앙을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상파괴주의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개인들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게 만드는 사회 윤리적 효과를 낳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