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많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종교법학자인 서기관, 성전의 제의를 주관했던 대제사장, 헤롯대왕의 아들로서 국토를 나누어 통치했던 분봉 왕들과 그들의 신하를 가리키는 헤롯당, 백성의 장로 등등 당시의 지도층들이 망라되어 예수의 언행을 공격했다. 평소에는 서로 원수처럼 여기던 적대세력들이 예수를 공격할 때에는 뭉쳤으니,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연합한 경우도 있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뭉친 경우도 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연합한 경우도 있고, 헤롯당과 대제사장들이 연합한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연합해서 성전에 계시는 예수를 찾아왔다. 그들과 논쟁하던 중에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종교지도자들과 가장 멀다고 알려진 세리와 창녀의 서열을 뒤집은 것이다. 성서에는 이러한 역전이 많이 나온다. 반전과 역전이 일어나는 곳, 그곳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품이다. 그 점에서 성서의 말씀은 인간의 상식과 생각을 뛰어 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도 거기에 있다.

예수께서 왜 세리와 창녀를 제사장보다 더 낫게 보았을까? 그 답은 다음 구절에 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여기서 세례 요한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례요한의 ‘의의 도’는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마태 3:2)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믿었다는 것은 본문에 있는 대로 ‘뉘우침’ 곧 회개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남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다그칠 줄만 알았지 정작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사람들의 높임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리와 창녀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 즉각 반응을 보이며 회개의 대열로 나왔던 것이다.

세리와 창녀를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으로 만든 것은 제의적 관점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시각보다는 종교적 시각 때문에 그들은 두말할 나위 없는 죄인으로 여겨졌다. 제의적 순결의 관점에서 볼 때에 세리와 창녀는 모두 혼탁하고 불결한 자들이다. 제의적 순결이란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 위한 정결 예법에 충실한 것을 가리킨다. 성과 속을 나누던 정결 예법의 기능은 공동체의 보존이었다. 그것은 오래된 자연종교의 금기와 타부에서 유래된 것이다.

누군가가 금기를 어겨 불결하게 되면 공동체 전체가 더러워지고, 공동체의 불결함은 거룩한 신의 노여움을 사서 재앙을 불러온다. 재앙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곧, 무한한 폭력의 악순환으로 공동체가 붕괴되어 모두가 죽음에 처해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 수많은 금기로 구성된 정결 예법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시시때때로 제물의 피를 신에게 바쳐 죄를 씻고 정결함을 되찾아야 했다.

금기를 어기는 죄의 핵심은 뒤섞이는 것이다. 순결을 잃는 것은 뒤섞이는 것이고, 뒤섞이면 피를 부른다. 폭력의 악순환은 뒤섞이는 혼란과 카오스에서 생긴다. 뒤섞인다는 것은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데, 위계질서의 기본이 되는 성과 속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부터, 부모와 자식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 등 모든 위계질서의 훼손은 혼란과 무질서로 인한 폭력과 죽음을 부르는 것으로서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방 종교의 신과 자신들의 하나님을 구분하였으니, 이방인과 섞이면 정결함을 잃는다고 믿었다.

동족의 수입을 샅샅이 뒤져서 이두메 출신의 헤롯과 이방인 로마총독에게 바치며 이익을 챙기는 세리는 이민족과 뒤섞여 살아가는 점에서 불결하고, 창녀는 혼인의 순결을 버리고 다른 남자들과 몸을 섞는 점에서 불결하다. 여인의 성적인 순결은 인류 공통의 관심사였고, 이방인과 섞이는 것을 불결하게 본 것은 만인을 위한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된 정통 유대인들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순결과 불결은 선악을 판단하는 데에 가장 오래된 기준으로서, 위생이나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제의적 관점의 언어들이다. 다시 말해서 순결과 불결, 정함과 부정함,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관념의 기원은 종교에 있다.

위생과 도덕성은 정도의 비교가 가능하지만, 종교적 죄는 정도의 차이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죄가 된다. 인류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간당한 여인을 불결한 존재로 치부했고 당한 여인 역시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긴 것은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순결의 관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연종교는 오랫동안 질서와 평화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해 왔고, 제의적 관점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고대사회에서 세리와 창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이요, 그 점에서 밑바닥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세례요한의 외침에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 앞에서 이제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만든 신분의 차이나 재산의 차이나 명예의 차이와도 상관없다. 도덕적 차이나 성과 속의 이분법적 정결예법에 충실한 정도의 차이와도 상관없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을 얼마나 낮추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번이 결정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명을 받은 두 아들의 비유를 가지고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분했다. 포도원의 주인인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에, 맏아들은 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일하기 싫다고 했지만 뒤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21:28-30). 여기서 제사장들은 맏아들이고, 세리와 창녀는 둘째 아들에 해당된다.

제사장들은 말은 잘 하지만 실행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세리와 창녀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회개할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 교만해진 제사장들은 회개할 줄 몰라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 그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서 어긋난 자들이요, 하나님의 권위로 일하지 않고 자기 권위를 내세우며 군림하는 자들이다. 예레미야가 탄식한 그대로이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겠느냐.”(예레미야 5:30-31)

플라톤의 『파이돈』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11인 위원회의 재판에 따라 죽음에 처해진다. 아테네 시민들도 그의 처형을 원했다. 소크라테스의 시기는 신전에서 드리던 제사에 대해 비판이 일어나던 시절이니, 곧 올림푸스의 신들에 대한 신앙이 시들해지면서 이성적인 철학이 막 등장하는 시기이다. 그러한 변화의 시기에 그리스 비극이 탄생했으니, 그리스 비극은 신을 경배하는 마음이 인간에게서 사라지면서 생길 무질서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비극이 유행하던 시기의 끝 무렵에 활동했다. 그러므로 신을 숭배하는 오랜 전통이 대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중요했던 때이다. 이성을 탐구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로 정죄되었고, 군중과 심판자들에 의해 죽음에 처해졌으니 말하자면 불안한 시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플라톤이 그려 놓은 소크라테스의 임종 장면을 보면, 감옥에서 독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스승 곁을 제자들이 굳건히 지키고 있다. 희생양에 굶주린 세상에 의해 스승과 함께 죽음에 처해질 수 있는 위기를 제자들이 굳세게 감당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스승이 가르친 진리를 잘 알고 있었고 진리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과 비교되는 장면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이 잡혀 처형될 즈음에 모두 도망갔고,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심판자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스승을 부인하며 군중 속에 숨어 들었다. 스승의 편에 서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나서 통곡했지만, 그렇다고 예수와 한패임을 시인하며 같이 희생되는 쪽을 택하지는 않았다.

르네 지라르는 플라톤을 가리켜서 래디컬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대한 철학의 통찰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킨 제자들의 얘기는 인간의 현실과 맞지 않으니, 인문주의자 플라톤은 인간의 선함과 능력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 지라르의 생각인 것 같다.

성서는 인간을 그렇게 똑똑하고 강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세상을 살릴 진리에 대해 인간은 무지하고, 잠시 깨우쳐도 실행하지 못하니 무능하다. 인간에 대한 성서의 통찰이 플라톤에 비해 더 사실적이다. 스승을 부인하고 통곡하는 베드로를 전하는 성서가 플라톤의 『파이돈』보다 더 현실적이고 과학적이다. 철학과 기독교는 인간관이 달라 구원관도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담담하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죽음을 통해 더 좋은 세상으로 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육체 때문에 진리를 침침하고 흐릿하게만 인식할 뿐인데, 육체를 벗는 죽음을 통해 인간 영혼은 진리를 뚜렷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성의 이탈이 인간성의 완성으로 가고, 인간성의 완성은 신성의 획득이다. 그리스 말의 행복은 ‘유다이모니아’인데, ‘신처럼 된다’는 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죽음을 통해 결국 신성을 획득하여 최고의 행복에 도달한다.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성서는 다르다. 플라톤이 추구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하나님 나라와 비교된다. 철학에 없는 반전이 성서를 관통한다. 그렇게 충성하던 제자들이 막판에 모두 도망가고, 세리와 창녀가 제사장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세리와 창녀는 철학자도 아니요, 진리를 사랑하는 자도 아니고, 스스로 진리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요, 실제로 진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회개하기가 쉬워 하나님에게 가깝고, 그리하여 진리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구원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고, 자기를 낮추어 회개하는 자들의 것이다. 그렇게 성서는 인간을 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로부터 해방한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업적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겸손과 자유의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