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은 오늘날 값비싼 아파트가 들어 서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이 이룬 부의 상징처럼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부의 증가는 개인의 관심사이고 국가의 목표이지만, 20세기 후반의 한국은 전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한 경제발전의 모습은 서울 도심의 번쩍이는 고층빌딩이 대변하는 듯한데, 특별히 강남의 변화가 눈에 띤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남동에 있는 이모 댁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곳에 강둑이 있어서 올라가 보았는데, 한강이 드넓은 폭으로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고 아주머니들이 강둑 아래쪽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물이 맑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먼 건너편에는 미루나무들이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당시의 한남동에는 나루터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강 건너편 미루나무 보이는 곳은 서울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었던 먼 시골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한남대교가 건설된 후에, 지금은 강남일대와 경부고속도로로 빠지는 차들이 북적되는 곳이 되었고, 그때 멀리 보이던 미루나무 뒤편의 조용한 시골마을은 지금의 신사동과 잠원동 일대인 셈이다.
강남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은 마라톤 대회와 관련이 있다. 70년대 초, 고등학교 2학년 때에 교내 마라톤 대회를 했던 곳이 나중에 강남으로 일컬어졌다. 당시만 해도 서울이라면 강북을 가리켰고, 학교와 집이 모두 강북에 있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학교에서 버스를 대절했을 텐데, 한남대교를 건너갔을 가능성이 크다. 한남대교는 1969년 말에 건설되었으니, 아마도 강남개발을 위한 목적으로 개통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마라톤을 달리던 곳이 전부 모래밭이거나 평평하게 정비된 넓은 땅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주택단지를 마련하기 위한 토목작업이 진행 중이었던 것 같다. 농사 짓던 농민들을 이주시킨 후에 농가들을 밀어내고 넓은 대지를 조성했을 것이다. 당시에 마라톤 코스 주변의 건물이라곤 영동여고 하나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유소가 하나 있었던가? 주변에 아무 것도 없이 건물 한두 채만 덜렁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70년대 초의 강남은 허허벌판이었다. 황량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적막함은 자연에 순응하던 농촌의 삶이 지나고 번쩍번쩍하는 현대문명이 들이닥칠 폭풍전야의 풍경이었던 셈이다. 70,80년대를 지나며 강남은 번쩍이는 햇빛을 반사하는 거대한 고층빌딩 숲으로 변모했으니,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압구정은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그전에는 경기도 언주면 압구정리였다. 압구정(狎鷗亭)이란 이름은 조선의 한명회가 지은 정자 이름이고, 동시에 그의 호이기도 하다. 갈매기와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니, 조용히 흐르는 한강 위를 날던 흰 새들이 정자 가까이 다가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겸재가 그린 압구정 그림을 보면 한강변 절벽 위에 정자 하나가 예쁜 자태로 서 있다. 15세기에 세워진 정자가 18세기 중반까지도 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긴 조선 500년 동안 한강의 풍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 왔을 테고 정자도 누군가가 물려받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884년의 갑신정변이 압구정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 당시 압구정의 소유주인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역적으로 몰리고 정자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절벽 위에 터만 남았다가, 70년대에 강남 개발과 함께 한강변에 주택단지가 조성되고, 다리가 건설되면서 옛날의 강변 풍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겸재 그림에 보이는 압구정 정자 바로 뒤로는 지금의 동호대교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동호란 동쪽에 있는 호수라는 뜻이니, 중랑천이 한강과 만나 넓은 호수와 같은 경관을 이루는 곳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난지도 앞을 서호라 부르고,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앞을 행호라 부르고, 지금의 옥수동 앞의 한강을 동호라 불렀다. 한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니 상류부터 동호, 서호, 행호로 이어지는 것이다.
겸재의 그림에는 압구정 말고도 번듯한 기와집들이 보이는데, 높은 관리들의 별장이었을 것이다. 그 집들은 물론이고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초가집들까지 지금은 모두 아파트 촌이나 빌딩 숲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굽이굽이 굴곡져 이어지는 절벽들의 곡선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절벽들 쪽으로 지금은 동호대교와 성수대교 그리고 영동대교와 청담대교가 뻗어 있다. 그림 맨 왼쪽의 동네는 지금의 청담동 쯤 될 것이다. 그림 오른편의 검은색으로 칠해진 산이 남산이고, 남산 맨 위에는 애국가에도 나오는 소나무가 서 있다. 남산과 그 앞 산 사이가 한남대교로 이어지는 한남동 골짜기이고, 다시 그 앞산은 옥수동과 금호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보인다. 그 앞으로 지금의 동호대교가 강을 건넌다. 내가 최근에 올라 강남을 조망한 진달래 공원은 그림 오른쪽의 낮은 산으로 보인다. 오른편 끝에 보이는 두 개의 모래톱 사이가 중랑천이 흘러나오는 곳일 것이다.

옥수동 앞쪽의 한강변에 있는 진달래 공원에 오르니 압구정과 강남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성수 대교와 동호대교 사이로 빌딩들과 아파트촌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멀리 대모산과 구룡산과 청계산을 배경으로 갖가지 모양의 높은 빌딩이 보이고, 저 멀리 왼편으로는 무역센터인 코엑스 건물도 보인다. 한명회의 정자 터는 한 평에 일억이 넘는 아파트촌이 되었으니, 역시 한명회에겐 보는 눈이 있어서 그가 머문 곳에 부귀가 모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부귀영화를 위해 수많은 정적의 처단을 서슴지 않았던 한명회가 좋아하던 곳에 현대 자본주의의 탐심이 창궐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세대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눈에 보면서 컸고, 경제개발과 민주화의 주역이 된 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면 국력이 한 개인의 자존감에 주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자랑스럽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세계에서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최첨단의 기술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상품과 방위산업의 발전은 우리 스스로를 대견하게 만든다. 초가집과 논밭이 있던 강남이 이처럼 변화한 것 역시 역동적인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상을 잘 보여준다.
그렇게 뿌듯한 감정과 함께 걱정스런 마음도 떠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서울의 집값이 비싸면 청년들이 어떻게 집을 마련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겠는가. 청년들이 결혼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집값과 사교육비를 든다고 하니, 참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또한 경제학자들은 돈이 산업 활성화의 투자금으로 흘러가지 않고 집값 상승의 기대 때문에 아파트 매입으로 쏠리는 현상이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아파트촌의 압구정과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이 겹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에게는 한명회란 사람이 조선의 최고 간신으로 알려져 있어서 왠지 압구정이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관심이 온통 권력의 중심인 왕궁에 가 있을 터인데, 언제 한가하게 강 건너 압구정에 머물며 마음을 비울 시간이 있었겠는가. 한명회는 과거에 실패하고 말단 관직에 있다가 대군 시절의 세조를 알게 되고, 1453년 계유정난을 주도해서 세조를 왕으로 등극시킨 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머뭇거리는 세조를 설득해서 단종을 몰아내고 수많은 왕족과 인재들을 죽이는 반정을 일으키게 된 것도 아마 열등감과 출세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물론 욕망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반정에 성공하고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주도면밀하게 돌아가는 머리와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와 위기를 돌파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할 것이다. 다만 똑똑한 사람의 그 용기와 지혜가 도리에 어긋난 사욕을 실현하는데 사용되면 주변에 큰 피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니, 용기와 지혜라는 말을 오염시킨 인생이 되고 말 수도 있다. 차라리 머리도 뛰어나지 않고 큰 용기도 없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범인의 삶이 적어도 민폐를 끼치지 않는 점에서 더 나을지도 모른다. 노자의 무위자연도 그런 시각에서 나온 말이니, 공부해서 나라를 바르게 경영할 실력을 갖추어야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가르친 유교에 대한 반박의 논리인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이 자칫 권력욕을 부추겨 오히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 노자의 교훈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물론 한명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성종 때부터 정권의 요직에 오르기 시작한 사림파들이 주도한 결과이니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나라를 망하게 하면서까지 사리사욕을 취한 간신은 아니었던 것 같으며, 나라 곳곳에 성을 쌓아 국방력을 높이고 북방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등 나라의 안위를 위한 공헌이 있었다. 그가 정비한 제도가 조선 말기까지 사용된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딸 중 두 명을 왕비로 들이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권력욕과 네 번의 정변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인재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낸 그의 삶은 유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람들은 그를 조선 최고의 간신 중 하나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말년까지도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궁에서만 사용하는 햇빛 가리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압구정에 설치하려고 성종에게 요청했다가 대신들의 질타를 받았고, 왕에게 알리지 않고 중국사신을 압구정에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가 마침내 삭탈관직을 당했다. 욕심이 없으면 큰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고, 욕심이 과하면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는 말도 있다.
인간사의 양면성과 욕심이 낳은 비극은 예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번영의 상징으로 보이기도 하고 혼탁해 보이기도 하는 압구정과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면서,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써 이룬 성취를 아름답게 보시고, 사느라고 지은 죄들을 용서하소서. 위기의 순간마다 맑은 정신이 솟아나 스스로를 정화하게 하셔서, 도도히 흐르는 한강물처럼 굳세게 하소서. 이 도시와 이 나라를 영원 속에 품어 주시고, 여기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을 지켜주소서.”
갑자기 신라 경주에서 울렸던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가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높이 매달려 땡땡 소리를 내며 신호를 주는 서양 종소리와 달리 땅에 가까이 붙어 있으며 저음의 장엄함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생명들을 감싸는 듯한 에밀레종 표면의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모양은 큰 산이 선 듯하고 소리는 용이 우는 듯하여, 위로는 산마루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무저갱에까지 그 소리가 스며드니, 종을 본 사람은 기이하다고 하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狀如岳立 聲若龍吟 上徹於有頂之嶺 潛通於無底之方 見之者稱奇 聞之者受福) 무저갱 곧 지옥에 있는 사람들까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신라인들의 마음이 오늘로 이어져, 이제 성덕대왕 신종의 장엄한 소리가 지금 눈에 내려다보이는 한국의 땅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