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잠두봉을 보러 양화 한강공원을 찾았다. 잠두봉은 지금 절두산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한강변을 조용히 걸으니 평화롭기 이를 데 없고, 대도시 서울 속에 숨어 있는 휴양지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40년 전 프랑스 유학 당시에 도시 내의 푸른 공원이 부러웠는데, 이제 우리나라에도 시민들이 쉬며 안식할 수 있는 공원이 많다. 우리나라 신도시 짓는 걸 보면 한국 건축가들과 기술자들의 도시 조성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느끼는데, 공원과 산책길도 참 아름답고 편안하게 만든다. 한강변의 공원 역시 잘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잠두봉(蠶頭峰)은 강변 절벽의 끝이 누에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고종 3년인 1866년에 대원군이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붙잡아 참수했고, 그 자리가 바로 잠두봉 밑의 한강 백사장이었다. 그때부터 잠두봉은 머리를 자른 곳이라 해서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불렸다. 지금 잠두봉에는 병인박해 때에 죽은 천주교인들을 추모하는 성당이 있다. 어렸을 때인지 청년시절인지 그 성당에 몇 번 가본 것 같다. 절두산 성당 옆에는 외인묘지가 있다. 주로 조선말에 이 땅에 들어와 선교와 의료 사업에 힘썼던 미국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겸재의 그림에는 큰 집이 보이는데 그 위치가 아마 지금의 외인묘지 자리이거나 그보다 좀 낮은 기슭인 것 같다. 이 지역은 조선의 임금 태종의 일곱째 아들 이정의 소유였으며, 이정의 손자 이총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림에 보이는 집은 대대로 태종 후손들이 머물던 별장이었던 것 같다. 그림에는 강기슭에 버드나무들이 서 있고 모래 톱 앞에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에 양화진이라고 불리는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강 건너 영등포 쪽에 양화진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강 양쪽으로 양화진이라는 이름의 나루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양쪽 양화 나루를 지금은 양화대교가 가로지르며 강남인 영등포 쪽과 강북의 합정동 쪽을 잇고 있다.

잠두봉 절벽 아래에는 어부인지 은거한 선비인지 모를 사람이 밀짚모자처럼 보이는 창 큰 모자를 쓰고 배에 앉아 한가로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띤다.

배 위의 어부 그림을 보니 2000년대 초에 친구와 함께 중국 계림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다. 관광산업을 위한 개발이 대대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런지, 계림은 수 천 년 동안 중국인들이 살았던 옛 산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며 천천히 흐르는 강줄기와, 굽이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둥근 곡선의 봉우리들이 원경과 근경으로 겹쳐 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국민감독인 장예모 감독이 계림의 이강을 무대로 삼아서 현대화된 중국 가무를 거대한 규모로 세계에 선보이며 중국이 세계의 강대국에 진입했음을 알렸는데, 정말 계림의 자연은 중국을 대표할만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당시에 친구와 함께 관광선을 타고 유명한 석회암 동굴을 구경하려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저 만치 떨어진 곳에서 작은 배가 떠 있었다. 배 위에는 어부가 누워 있었다. 낚싯대는 드리워 있는데, 어부는 고기잡이에 관심이 없는지 엎드려 자는 듯 했다. 좀 떨어진 곳에서 오가는 관광선을 관계치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내게 맞는 삶이 있다는 듯이. 어디선가 본 동양화와 똑같은 풍경이었는데, 내게는 계림의 그 어떤 풍경보다 강위의 배 안에서 세상모른 채 누워있던 어부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겸재가 남긴 그림을 보면 한강변의 모습은 계림에 뒤지지 않는다. 둥그런 모양을 한 봉우리들이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계림도 장관이지만, 멀리는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남산 등의 높은 봉우리의 산들이 보이고, 가까이는 흰 모래톱들 위로 낮은 봉우리의 산들과 절벽들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한강의 모습은 친근하고 아름답다. 더구나 너무 먼 곳이 아니라 수도 서울을 끼고 그런 풍경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겸재의 그림에 나타난 한강은 문명을 일군 인간이 자연에 감사하는 겸허한 마음을 담아 흐르고 있는 듯하다.

겸재의 그림에 나오는 잠두봉은 양화 한강공원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유공원을 찾아 갔는데, 선유공원은 선유도라는 조그만 섬을 가리킨다. 섬까지 걸어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어서 다리를 찾아 올라갔더니 멀리는 북한산과 북악산 그리고 가까이는 여의도까지 주변 풍경이 다 보인다. 겸재의 그림에 선유봉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선유봉은 영등포쪽 양화진에 있던 봉우리이다. 그 그림에 보면 선유봉 앞에 모래톱이 길게 나와 있는데, 겸재 이후로 세월이 백년 이 백년 흐르면서 그 모래톱이 조그만 섬이 되어서 선유도로 불리게 된 것 같다. 마치 겸재 그림에 나오는 지금의 상암동 앞 한강변의 모래톱이 일이백년 지나면서 난지도가 되었듯이 말이다.

선유도공원은 그 자체로 좋은 산책로이다. 조용히 걸어서 잠두봉이 보일만한 곳을 찾으니 여의도와 마주한 곳인데, 위로는 양화대교가 지나고 있다. 그러니까 양화대교 밑에서 잠두봉을 바라본 셈인데, 그러나 아쉽게도 잠두봉은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 앞으로 당산철교가 지나고 있고, 무슨 광고간판 같은 것들도 서 있어 풍경을 완벽하게 가려버렸다.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지나다 보면 그래도 잠두봉 윗부분과 성당이 조금 보이는데, 잘 보여야 할 강 건너 맞은편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산철교 위로 지하철이 부지런히 오가고, 그 뒤로는 여의도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아주 작은 바위섬 같은 것이 강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설치되어 있는 망원경으로 보니 바위섬에 풀들이 좀 나 있고, 해오라기 한마리가 서서 날개를 말리고 있다.

어린 시절에 봤던 여의도는 모래밭이었다. 버스를 타고 남쪽 시골 어딘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여의도 모래밭을 거치게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 여의도에는 군용 비행기들이 서 있었다. 한참 지나 군복무 중에 국군의 날 행사에 동원되어 여의도에 막사를 치고 먹고 자면서 일했는데,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과 군 인사들이 군대를 사열하고 군 행진을 관람할 수 있는 스탠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내가 속한 부대는 유사시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을 때에 끊어진 부분을 잇는 조립교를 건설하는 부대였는데, 다리 놓는 철강 자재를 가지고 스탠드를 만들었던 것이다.

여름 땡볕에 고생하던 후임들과 달리 군복무 끝 무렵에 나는 비교적 편하게 지냈던 것 같다. 도심에서의 막사생활은 군부대 밖이라는 점 자체가 자유를 의미했고, 더구나 나는 말년이어서 노동에서 열외가 되어 더 여유로웠던 것 같다. 그때 여의도 막사에서 내가 읽은 책이 현대 무용의 창시자 이사도라 던컨의 전기였다. 내 관심이 참으로 사방으로 뻗쳤던 모양이다. 특별히 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불처럼 살다간 그녀의 열정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용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데, 20대의 나는 무슨 일에 빠져들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정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삶은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선유도공원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여의도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된 풍경을 잘 보여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건축된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쌍둥이 건물로 불리는 LG 타워가 보인다. 인류역사에서 경제는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 언제나 정치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경제가 다른 모든 영역을 잠식한 적은 없었다. 정치는 경제의 보조자가 되었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예속되어 가고 있다.

원래 자본이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에 투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산과 수요를 만들어 부를 획득한다. 더구나 금융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생산과 무관한 일종의 돈놀이에 의한 수익이 생산에 의한 수익보다 훨씬 커졌다. 견실한 기업들이 거대 자본의 돈 장난에 의해 망하는 일들이 속출하는 세상이다. 말은 그럴싸하게 이렇게 저렇게 갖다 붙이지만 결국 금융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는 돈놀이와 돈장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1525년에 마르틴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이 있었다. 교회의 부패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던 에라스무스는 용감하게 일어서 종교개혁에 나선 마르틴 루터를 좋아했다. 루터 역시 에라스무스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며,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에 사용한 원문 판본은 에라스무스가 펴낸 그리스어 신약성서였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로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 에라스무스와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며 노예의지를 말한 루터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둘 사이의 논쟁은 인류사회에 근대라는 새 시대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자유라는 말을 기치로 내세운 근대의 문을 여는 데에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루터의 노예의지론이 자유로운 근대사회를 열었다.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노예의지론에 따르면, 인간은 죄의 노예상태에 처해 있으므로 자유롭지 못하고, 선한 것을 만들어 낼 줄 모른다. 오로지 하나님의 힘에 의지할 때에만 인간은 선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예의지론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중시하던 전통이라는 것도 인간의 산물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더구나 교황도 인간으로서 죄인인데 마치 교황의 말과 판단을 하나님의 것처럼 위장하는 것에 대해 루터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루터의 눈에는 교황의 권위야말로 신성모독으로 느껴졌다. 그가 교황을 위선자요 사탄이라고 공격한 것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성서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있었다. 그런데, 교황에 대한 루터의 공격은 모든 권위주의에 대한 공격이었고, 오랫동안 관습으로 내려온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가족과 마을과 직장과 국가공동체 전체가 권위주의적 상하질서를 중심으로 평화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루터에게는 인간 개인이 중요했다. 누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고, 옳은 대로 행할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 이라는 구호는 결과적으로 외부의 강요가 아닌 자율적 판단과 노력에 의해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개인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외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몇몇 깨달은 자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각자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며, 이것이 17세기의 자유주의 사상과 운동으로 번지며 근대가 시작된다.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을 쓴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견해에 반대했다. 당신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면, 그것은 결국 욕망의 자유가 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유에는 부작용이 따르겠지만 부작용이 무서워서 진리를 포기할 수 없다. 에라스무스는 자유로운 개인이 자기욕망을 통제하지 못할 때에 초래될 사회적 재앙을 두려워했다. 교회를 비판하던 그가 루터와의 논쟁 후에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을 옹호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인간에게는 외부적 권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복음주의자요, 그래서 과격한 사상가요 혁명가의 모습을 갖춘 루터의 『노예의지론』이 근대라는 새 시대를 열었다.

루터의 자유는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로 이어졌다. 자유 민주주의는 복음주의의 열매이다. 그런데, 끝없는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현실화되면서 인간은 절제를 상실했고 경제주의(economism)가 지배하게 되었다. 모든 평가는 돈으로 말하고 사람의 평가도 돈이 말해준다. 돈이 모든 걸 말해주는 세상. 재테크가 시간의 지배자가 되었다. 평생 아파트 값을 묵상하면서 산다. 세상과 체제가 그런 삶을 강요한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자유 시장경제가 자유 민주주의를 삼키는 것 같다. 그 둘은 동반자인데, 경제가 정치를 이긴 것 같다. 그러면 결국 돈만 남고 사람은 자유를 잃을 텐데 말이다. 경제주의에 종속된 정치는 다시 권위주의를 불러올 텐데 말이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가 그런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톨릭 신학자들은 루터를 비판한다. 루터의 자유가 결국 오늘날 같은 물신주의의 사회를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루터의 자유가 욕망의 자유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던 에라스무스의 얘기가 맞았을지 모른다. 루터가 자유라는 선물을 인류에게 준만큼, 그 부작용이 가져온 문제에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작용의 책임은 인간의 탐심에 있지 복음에 충실한 루터에게 있지 않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존엄하다. 그것이 성서의 인간관이고 초대 교부들의 인간관이었다. 루터의 말대로, 부작용이 있더라도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마음껏 부를 추구하고 경쟁자를 압도하는 힘을 기르는 데에 자유를 사용하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흐름은 고쳐져야 한다. 자유의 부작용을 얼마나 바로 잡을 수 있느냐에 한 사람의 행복과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 같다.

여의도의 국회의사당과 증권회사의 빌딩들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이 스쳐갔다. 한강과 여의도.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터전인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인간의 자유가 존중되고 동시에 자유의 부작용이 치유되는 선하고 아름다운 문명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