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내 친구 조원경 목사가 작은 책 한 권을 번역했다. 장흥 임씨 일가의 선비 임재당이라는 분이 쓴 일기인데, 아내 홍 씨가 죽은 1724년부터 1-2년 후에 자신 역시 임종을 맞는 시간까지의 기록이다. 임재당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기형식으로 짧은 한시 백편을 지었다. 아내가 죽을 때의 나이가 마흔 둘, 임재당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아내가 죽은 직후의 슬픔을 기록한 시부터 상을 치르며 손님을 맞을 때의 감정과 상이 끝난 후에 시신을 땅에 묻을 때의 슬픔, 그리고 이후에 홀로 살며 먼저 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읊어 놓았다.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그 역시 세상을 등졌으니, 그는 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내의 죽음으로 더욱 단명하게 된 것 같다.
감정을 절제하던 조선시대에 이처럼 애통한 마음을 구구절절이 길게 기록한 문서는 보기 드문 일이니, 조 목사도 일기의 특이함에 매혹되어 고서를 구입하고 번역했다고 한다. 일기를 보면, 임재당 아내의 때 이른 죽음은 가난과 지나친 노동 그리고 약 중독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 같다.
임재당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으며, 아내와 결혼할 때에 어머니가 계신 낡은 집과 노비 두 명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노비 두 명이 차례로 죽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젊은 부부 둘이 열심히 일하여 농사짓고 돈을 벌었다면 가난은 면했을 터인데, 사정이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문제는 과거시험이었다. 선비 임재당의 유일한 일과는 과거시험 준비였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했는데, 필경 결혼 전부터 과거공부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공부는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20년 가까운 결혼 생활동안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사이에 집안 경제와 살림을 도맡은 것은 그의 아내였다. 농사지을 땅도 없었는지 두 사람은 어머니를 옛집에 두고, 아무도 살지 않는 외진 땅을 개간해서 그곳에 집을 새로 지었다.
변변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손으로 밭을 일구는 일은 얼마나 힘들었겠으며, 그렇게 일군 땅이라야 그 넓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집 역시 둘이 나무와 돌을 모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게 두 달 만에 지은 집이 오죽하겠는가. 20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19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의 초가집은 대개 진흙과 수수깡으로 지어서 기둥이 반듯하지 않고 집이 기울어 있었으며 천장도 낮아서 머리가 닿을 지경이었고 방 안에는 흙냄새와 짚 냄새가 짙게 풍겼다. 임재당 부부가 살았던 집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온갖 고생을 모두 보상해 줄만한 희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일은 임 선비뿐 아니라 아내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고, 그 일을 위해 아내는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인 임재당은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하였고, 사람들이 버린 땅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마련하고 주변에 나무와 과수를 심어 가꾸는 일은 대부분 아내의 몫이었다.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임신을 위해 아내는 오랫동안 약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다가 아내는 병이 들고 남편의 과거 합격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죽었으니 변변치 못했던 남편으로서 임 선비는 얼마나 미안했을 지 짐작이 간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갑작스레 그대 떠나 집만 덩그러니 남아
남긴 자취 돌아보니 흐르는 눈물 견딜 수 없어라
창밖 꽃밭 지난날과 같은데
울타리 담에는 쓸쓸한 가을 오니
온 사방 슬픈 빛깔로 소나무는 푸르르고
한줄기 차가운 빛깔 대나무 숲 그윽해
아! 세상 모든 일 어제와 같지 않으니
마음 아파 슬피 우니 흰 머리만 생겨나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과거시험에 목을 매고 있었을까? 지금 보면 참 답답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다. 그러나 옛날에 과거시험은 입신출세하는 유일한 길이요, 다른 돈벌이가 별로 없었던 시절에 벼슬을 하여 국록을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정적인 가정경제를 보장했다. 더구나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아가면 신분이 달라졌으니, 관직이란 곧 남들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자리였다.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와 달리 조선시대에 정치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일이었고, 그래서 정치는 곧 통치를 의미했다. 과거제도는 통치 권력을 행사하는 관직에 나가는 수단이었으니 인간의 권력욕과 소유욕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에 합격하는 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사업이었다는 점이다. 양반이라 할지라도 삼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 일족은 허울만 양반이었으니, 왕족의 후예라도 집안에 과거 합격자가 없으면 몰락양반으로서 평민이 되는 경우가 숱했다. 그러므로 과거 합격은 개인의 영달에 그치지 않고 대대로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드높이는 거창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임 선비의 아내가 병을 얻어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하늘이 만약 나를 돕는다면 반드시 남편보다 나를 데리고 가리라”고 말한 것도 남편이 살아 시험에 합격하여 가문에 기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식이 없던 여인으로서, 자기가 시집 온 집안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편의 성공을 기원했던 것 같다.
바로 이 점에서 유교가 품고 있는 큰 심리적 모순이 있다. 유교는 동아시아인들을 문화인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문학이다. 인문학으로서 유교는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마음공부와 자기수양을 통해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중시한다. 그런데, 유교는 또한 처음부터 정치철학으로 출발했다. 마음을 닦아 성인처럼 물욕이 없는 상태에서 관직에 나아가 백성에게 도덕적 모범을 보이고 사심 없이 국정을 처리하면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 것이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사심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사심 없는 사람을 고를 수 있는가? 결국 유학이 택한 것은 마음공부를 과거시험 과목에 넣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의 핵심과목은 오늘날의 철학과 문학에 해당하는 사서삼경이었으니, 마음을 비우는 이치를 알고 행하면 천리가 주도하는 지혜를 가지게 되어 복잡한 국정을 가장 덕스럽고 정의롭게 운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거제도의 심리적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심을 없애는 공부를 하는 동기에 사심이 들어 있다.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목적이 관직에 나아가는 데 있고,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권력과 부를 누리며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니 관직과 정치를 통해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것은 겉의 명분이고, 과거를 준비하는 실제적 동기는 자신과 집안과 가문의 영달과 신분유지에 있었을 것이다.
나라를 섬기기 위한 정치는 신분이 다르다는 특권의식 속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수직적 위계질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유교에서 민주주의가 나올 수 없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한편 관직에 나간 정치인들은 권력에서 밀리지 않고 더 높은 관직을 얻기 위해 서로 파벌을 이루어 엄청난 권력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변치 않는 정치의 현실이다.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폭력을 행하면서도 사심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늘 인용되었으니, 결국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사리사욕이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정당화하는 일에 사서삼경의 가르침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정치인들의 특권의식과 국민만을 바라본다는 자기기만적 언사는 민주주의 체제를 택한 대한민국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정치가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현상은 보편적인 인간현상이지만, 한국정치의 병폐는 조선의 과거제도가 만든 심리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도 많은 것 같다.
더구나 조선에서 정치는 인간성의 완성을 이루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유학의 경전인 『대학』은 “마음속의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여, 최고선에 머문다.”(明明德, 新民, 止於至善)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명명덕(明明德)은 내면의 선한 본성을 드러내는 수양의 작업을 가리키고, 신민(新民)은 백성을 교화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내면의 자기수양 후에는 바깥으로 나가 정치를 해야 지선(至善) 곧 최고의 선에 도달하게 된다. 참인간이 되려면 자기내면의 덕을 세상을 경륜하는 데에 활용하여 세상을 구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태어나서 관직에 나가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기완성을 향한 의무인 것이다.
이렇게 관직과 정치가 인간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졌으니,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나친 정치지향적인 습성은 인간의 권력욕을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연관시켜 포장하고 정당화한 유교의 정치철학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임 선비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과거에 매달린 것에도 잘 먹고 살려는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이유도 함께 포함되었을 터이니, 현대인으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더구나 남편의 과거준비를 위해 그야말로 모든 것을 희생한 아내 홍 씨의 삶은 현대 여성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자기실현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으며, 자기희생이라는 오래된 덕목은 구조 악에 위한 억압으로 인식된다. 사실 과거사회는 각종 위계질서를 중심으로 유지되었고, 신분과 성별과 남녀와 노소에 따른 차별을 두어 희생양 만들기를 제도화한 구조 속에서 살았던 게 사실이다. 근대 이후에 한 개인의 존엄성과 행복추구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억울한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발전된 사고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임 선비의 아내가 자발적 희생을 감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습이라는 구조의 억압에 따른 것이며, 현대인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임 선비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요 성정이 선한 사람이었던 것 같고, 부부 사이가 좋아서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것 같다. 죽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백 편의 시 하나 하나에 잘 드러난다.
당신과 나눈 사랑 이렇게도 크지만
이십년도 같이 살지 못하였구나!
갑작스레 영원히 헤어지게 되니
긴 슬픔, 한 가슴 일어나누나!
덕 있으면서도 일찍 죽고
당신 없어도 나는 죽지 않네.
남긴 자취 남아 있어 너무 애달파도
전해 줄 아이조차 없구나!

물론 그들의 사랑도 부부유별이라는 오륜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게 서로 예의를 갖추는 전제조건이 붙어있었고, 그 예의란 사회가 부여한 것이요,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거리감으로 보일 수 있다. 둘 사이에 사회가 끼여 있는 것이다.
300 백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임재정 선비와 그의 아내 홍 씨의 삶은 우리의 삶과 많이 다르고, 인간의 역사는 발전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예전에 비해 인간은 많이 자유로워졌고 기회는 많이 평등해졌다. 그러나, 당시의 기울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삶이기는 하지만 절제가 몸에 밴 채 고생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성실하게 지내며 죽기까지 의젓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면이 없지 않다.
아내 홍 씨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내가 평생 사치를 싫어하여 죽더라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꾸미지 말로 부지런히 사십시요.” 누구 보이려고 하는 허영과 사치를 멀리하고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라는 당부는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기를 가르치라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인 유학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이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유학은 그것을 천명이요, 하늘의 뜻이요, 진리로 받아들인 사상이다. 삼백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시골 여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했던 의연함과 의젓함에 경외심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