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성곽 길을 복원한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서울 한양은 그 자체로 보존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이다. 겸재의 ‘장안연우’라는 그림을 보면 서울이 숲속의 도시요, 보금자리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산으로 둘러싸이고 성곽으로 보호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봄비 온 뒤에 안개가 자욱한 서울의 풍경이다. 정면에 원경으로 남산이 보이고 정상에 소나무가 서 있다. 아마 저 소나무 밑에 국사당이 있었을 것이다.
근경의 오른쪽 마을은 지금의 청운동과 옥인동, 그리고 그 너머로 적선동과 사직동까지 보인다. 서촌 지역이다. 사직동 너머의 경사진 길은 지금도 남아 있어 차를 타고 인왕산으로 올라 북악스카이웨이까지 이어지는 그 길인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저 길이 인왕산에서 내려와 경희궁 쪽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지금은 60년대 말에 건설된 사직터널에서 내려오는 길 때문에 경희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지만 말이다. 서촌 앞에는 시내가 흐르는데, 인왕산 동쪽끝의 백운동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다. 지금은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되어 있다. 내를 사이에 두고 서촌 맞은편 동네가 지금의 효자동으로 보인다. 그림 맨 밑의 큰 소나무 두 그루 밑으로 보이는 마을이 지금의 궁정동 자리인 장동이며, 김상헌의 후예들이 대를 이으며 살던 곳이다. 담장을 두른 곳은 지금도 남아 있는 육상궁이고, 그 뒤로 숲이 무성한 곳은 공터로 남아 있던 경복궁이다. 경복궁 앞 광화문 지역의 마을들이 안국동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정도전의 설계로 한양이 새로운 수도가 된 후 1396년에 한양을 둘러싼 도성이 완성되어 한양은 성곽도시가 되면서 한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수도 한성의 관할은 성곽 바깥 십리까지로 정해졌다. 굴곡진 산과 낮은 언덕을 구불구불 이어 서울을 방어하는 성곽은 사방에서 흘러내린 한양의 모든 물이 빠져 나가던 동대문 오관수문의 낮은 지대까지 연결하면서 서울의 윤곽을 완성했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로 서울이 점차 커지면서 성곽이 일부 유실되고 일제 강점기에는 전차길을 내느라고 사대문 주변이 사라졌는데 21세기에 들어 서울시에서 완전히 복원했다.
복원된 성곽길은 시민들의 훌륭한 산책로가 되었으니, 단풍이 든 계절에 가파르지 않은 곳을 골라 천천히 걸으면 호젓하면서도 풍요로운데, 성 안팎의 풍경을 모두 보며 오르다 보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의 운율이 들리는 듯하다. 케데헌에 나온 성곽길은 아마 동대문과 혜화문 사이인 것 같은데,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모이는 명소가 된 것 같다. 요즘 시내에 나가보면 외국인이 정말 많아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딜 가나 외국인들이 북적대며 풍경을 사진에 담느라고 여념이 없다.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성곽길도 훌륭하게 복원되었다. 복원된 길은 예전에 오르던 길보다 훨씬 아름답다. 계단이 많던 곳이 약간 가파른 본래의 언덕 형태로 바뀌어 복원되었고, 석회가 섞인 단단한 흙길 주변으로 억새 풀이 무성하게 자라 가을의 무늬를 이루며 성곽과 어울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리 위로 보이는 남산 타워만 아니면 조선의 그 한양에 와 있는 것 같다.
중학교 1,2학년 때에 남산을 자주 찾았던 같다. 숭례문에서 남산을 향해 걸어 올라가면 계단이 나왔고, 계단을 한참 오르면 광장이 나왔다. 광장 한편에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서 있었고, 동상 주변으로는 늘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누군가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연사들이 얼마나 심각한 얼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 손에 신문을 접어들고 주먹을 흔들며 힘주어 말하는 연사들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광장을 가득 채운 격한 감정의 원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세상에는 뭔가 복잡하고 어렵고 억울한 일들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 내 가슴을 채웠다. 연설이 끝나고 무리가 흩어질 때 일어나는 뿌연 흙먼지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돌아가는 군중의 허탈감을 드러내듯 슬프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힘들 때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라, 죽은 사람이 많았고 자식을 잃은 부모, 남편을 잃은 아내, 아버지를 잃은 아들딸들이 많았으며 전쟁 고아도 많았다. 3년의 전쟁동안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서 무려 4 백 만 명이 죽었으니, 단위 면적 당 사망자 수로 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들의 눈에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상이군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그들은 자주 험악한 표정을 지어 어린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먹을 것도 넉넉지 않아서 깡통을 들고 밥을 구하는 아이들이 남의 집 대문 앞에 서서 구걸하는 일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정치권은 좌우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분열되어 싸웠고, 국민들은 대세가 어디로 기우는지 눈치 보며 생존의 길을 찾는 데에 민감해졌다. 생각과 사상의 자유가 억압되며 빨갱이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식민지 생활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된 시절인데, 빨갱이 청산의 바람이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제를 덮어 버렸다. 북한과 대립하는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심판되는 것이 불가피한 역사의 과정이겠지만, 인간현상이 늘 그렇듯 필요 이상의 피가 이 땅을 적셨고 양심적 지식인들과 무고한 양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친척 중 누가 빨갱이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평생 불이익을 감수하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무슨 억울한 일이 있을까? 다리를 약간 저는 어떤 사람이 중학생인 나를 붙들었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나에게 어른이었다. 자기와 얘기 좀 하자고 했다.
60년대 말. 당시 남산에 오르는 길 우편에는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서울역에 내린 후에 갈 곳이 없어 맞은 편 남산 언덕에 눌러살게 되면서 거대한 마을이 이루어졌다. 아마 그 판자촌이 남산 기슭을 따라 이태원까지 이어져 있었던 같다. 검정색으로 물들인 군복바지를 입은 그 청년은 술을 먹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크게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바지에 누런 흙이 묻어 있었고 청년은 뭔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와 얘기 좀 하자는 말을 되풀이 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조심하고 도망치라는 당부를 많이 듣던 시절이다. 순간적으로 무서웠지만, 슬퍼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얘기 좀 하자는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가자고 했고, 나는 그가 가자는 대로 갔다. 대로를 지나 판자촌으로 들어섰는데, 정말 골목골목 미로를 따라갔다. 햇빛도 잘 안 비치는 좁은 골목길을 깊숙이 들어가며 나는 그를 믿었다. 신뢰가 용기를 만들었다. 얼마를 갔을까. 어느 작은 판자집에 이른 후에 우리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지나가는 어린 학생을 붙들었을까? 한참을 같이 있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빨갱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데, 그의 가까운 친척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청년의 운명을 바꾼 것 같았다. 울분에 찬 열변을 토한 후에 그의 얼굴은 비교적 평온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얀 얼굴로 내게 던진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를 따라와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집에 와서 얘기하니 어른들이 크게 야단쳤다. 거기가 얼마나 무서운 데인 줄 아냐고. 매춘도 있고 범죄도 많은 곳이라고. 정말인지 괜히 떠도는 과장된 얘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나에게 그곳은 검정색 군복 바지를 입고 있던 얼굴이 하얀 그 청년의 울분이 가득 찬 곳이었다.
전쟁 후 남한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빨갱이로 몰리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엉뚱한 사람을 빨갱이로 모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고, 마을 안에서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선명성을 내세우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우리 사회의 극단적 분위기는 그 시절의 유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 것이다. 선명성이 중요해지다 보니까 중도는 사이비로 여겨졌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자리잡기 어려워졌다.
정치인들에게는 자신의 정적을 빨갱이로 모는 게 가장 좋은 승리 전략으로 자리 잡은 듯했다. 남북 전쟁과 분단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의 비극을 이용하는 자들이 많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올라가고 삶이 여유로워지고 민주주의가 정착하면서 정치인들의 그 못된 버릇이 사라지는듯 했는데, 여전히 손쉽게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는 세력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빨갱이의 이름으로 정적을 처단하려는 것은 얼마나 비열한 짓인가. 아직도 그런 방식으로 어느 정도 지지자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성서에는 무고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린 땅은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옛날의 그 광장에는 목소리를 높이던 연사들이 보이지 않고, 한가로이 산책하거나 관광 온 사람들이 조금 있다. 김구 광장에서 좀 더 오르면 남산 중턱의 넓은 광장이 나온다.
멋들어지게 굵은 가지를 늘어뜨린 느티나무들이 노란 단풍을 한 아름 안고 맞이한다. 몇 그루의 느티나무가 겹쳐지며 수많은 잎들이 모여 만들어진 단풍은 마치 하늘을 덮은 은하수 같이 보인다. 은행나무가 온통 노란 잎사귀로 물들어 푸른 하늘 밑에 서 있는 것도 아름답지만, 약간 진노랑으로 물든 큰 느티나무는 뭔가 역사가 있는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오래되어 육중해 보이는 몸통에서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검고 굵은 가지들은 코스모스의 중심 축인 듯 단풍과 어울려 엄숙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왼편에 네모반듯한 창과 둥그런 지붕을 가진 흰 건물이 보인다. 60년 대 중반인가? 육영수 여사가 세운 어깨동무 재단의 건물이다. 그 재단에서 나오는 『어깨동무』라는 어린이 잡지를 읽은 기억이 있다. 고층건물이 없었던 시절에 남산에 서 있어서 어디서나 보이던 그 건물은 한때 서울의 명물이었다. 그 이후에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도 사용되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서울시 교육청 산하기관의 간판이 걸려 있다.
맞은 편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어린 시절 여러 번 들렀던 곳인데, 지금은 매우 현대적인 건물로 바뀌었다. 그 자리는 일본 신궁이 있던 곳인데, 해방 후에 신궁을 헐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서울 시내와 경복궁을 내려다 보는 남산의 중턱에 넓은 터를 닦고 신궁을 세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신이 조선 왕궁을 누르며 영원히 조선을 지배하기 바랐을 것이다.
일본의 왕은 일종의 대제사장인데, 칼싸움이 난무하며 늘 요동치는 정치 세계와 동떨어져 하늘과 통하는 숭고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도망갈 데 없는 섬나라이므로 서로 죽기까지 싸우면 모두 망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안정과 질서를 위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권위가 필요했던 지정학적 원인으로 만들어진 것이 천황 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사람을 신격화하는 우상숭배의 일종이고, 모든 우상숭배는 보편 가치의 성장을 막고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 일본이 과거사를 사과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국제사회 속에서 지도적 국가가 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산 중턱에는 식물원이 있었는데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성곽 터를 볼 수 있도록 전시장이 서 있다. 위쪽으로는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다. 고등학교 때와 대학생 시절에 가끔 오르던 길인데, 지금은 편히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잘 정비해 놓았다. 천천히 오르면서 보니 복원된 성곽이 길을 같이 했다. 예전에 오르던 길이 성곽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도 외국인이 많이 눈에 띈다. 이처럼 수도 한 가운데에 시대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산이 있는 나라는 드물 것이니, 남산은 외국인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남산은 높지 않다. 동쪽의 낙산이나 중앙의 북악산이나 서쪽의 인왕산 보다는 높지만 영어로 마운틴이라고 하기보다는 힐이라는 말이 적합할 것 같다. 정상에 오르니 전에 있던 팔각정이 그대로 있다. 이곳에는 원래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곳이다. 국사당은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곳인데, 가물 때에 기우제를 드리고 홍수 때에는 기청제를 드렸다.
남산의 본래 이름은 목멱산이고, 태종은 목멱산에게 왕의 칭호를 내려 목멱대왕을 모신 산당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국사당이다. 산이나 강에 왕의 칭호를 내리는 것은 조선 이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으로서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며 소원을 빌었던 오래된 애니미즘의 유산으로 보인다. 수도 한양 전체를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곳에 제사 공간이 있었으니,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 초월적 힘에게 비는 일은 중대사로 여긴 것이다. 국사(國師)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현재 국사당은 인왕산 선바위에 있는데, 이성계와 무학대사를 비롯해서 제석신과 용신 등 다양한 신을 모시고 굿을 한다. 1925년에 일본인들이 중턱에 신궁을 지으면서 신궁보다 국사당이 높은 곳에 있다는 이유로 철거해서 이전하여 현재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정상에서 보니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날씨가 좋아 멀리 도봉산과 수락산까지 보이고 좌측으로는 관악산과 멀리 계양산까지도 보이는데, 여기 바로 눈 밑으로 보이는 곳이 원래의 서울인 옛 한양이다. 주산(主山)인 북악산은 뒤쪽에 조산(祖山)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북한산에 묻혀 너무 낮아 보이고 윤곽도 흐릿한데, 앞의 청와대 건물 때문에 존재가 확인된다. 인왕산에는 복원된 성곽이 정상에서 밑까지 구불구불 흰 뱀처럼 내려오니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서촌 앞에 복원된 경복궁이 넓은 터를 차지하며 자리 잡고 있어 보기에 좋다. 전에는 일본인이 지은 중앙청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중앙청 앞의 은행나무 길이 유명했는데, 가을이 되면 인도를 덮은 은행나무 잎들을 밟으며 중학교에 오가던 시절, 어느 때인가 중앙청 앞의 광화문이 복원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렸다.
그 무렵에 정부종합 청사도 들어섰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기초공사를 하는 것도 놀랄일이었고, 기초공사가 끝난 후에는 그렇게 빨리 건물이 올라가는 것도 놀라웠다. 학교를 오가며 나날이 올라가는 건물을 신기하게 여긴 기억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최첨단의 건축기술이 적용된 첫 사례가 정부종합청사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 김영상 대통령이 중앙청을 헐고 경복궁을 완전히 복원해서 오늘날의 풍경이 만들어졌다.
사방을 둘러 친 산과 그 산길을 따라 이어진 성곽 안으로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사람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산과 숲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 낸 건축물들이 어울려 미학적으로 뛰어난 공간을 이루고 있는 곳이 서울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은 시대정신을 만들고 대를 물리면서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진보의 역사가 이루어게 되리라고 믿는다. 시간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