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 12 금
크리스마스의 계절이다. 성서가 전하는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희망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들이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리라는 얘기이다. 또한 성서는 정치에 대한 경고를 크리스마스 메시지에 담고 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제거하려고 한 이야기이다.
첫째,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희망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의 탄식이 깊어지고 무력감을 느끼며 세상에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 희망의 근거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희망의 원천이다. 삶은 우리가 살지만 제대로 사는 삶의 시작은 하나님에게 있다. 삶에서 생기는 좌절과 어둠은 우리 것이지만, 희망은 하나님의 것이다. 자기 주관을 멈추고 자기의식을 비우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빛을 받아야 어둠이 걷히고 모든 게 분명해진다. 어둠은 지워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 빛을 비출 때에 없어진다. 빛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안에 생명과 빛이 들어 있다고 했다(1:4).
내가 꼭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뜻대로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한 불가능하다. 날마다 매 순간 그걸 잊어버리고 내게서 출발하려고 한다.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하는데, 잊어버리고 나로 돌아간다. 하나님에게서 출발하는 길밖에 없는데, 그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리석음이 거기에 있으니 무지의 죄이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니 사람의 어리석음이 크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 채, 앞에 나서서 엄청난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 사람 사는 세상은 혼란스럽고 혼탁하다.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진 혼란과 혼탁은 죄의 열매이다.
세상의 죄가 깊고 두껍다. 세상은 죄의 두께를 보호막처럼 두르고 있다. 하늘의 햇빛이 뚫지 못하는 두꺼운 먹구름 같은 무지의 죄가 세상을 두르고 있다. 비계처럼 두꺼운 죄를 보호막으로 삼으니 혼란과 불신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는 즐거움도 고통이라며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복되다고 했을까? 죄와 고통이 극심한 우리 삶을 향해 하나님이 오신다. 말로만 해서는 알아듣지를 못하니 몸으로 보이시려고 오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오신다(요한 1:14).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들고 그리스도가 오신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복음(good news)이란 ‘하나님이 하신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것이 복음이다. 내가 하면 남과 충돌해서 일이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고 선한 힘을 힘입으면 된다.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한 1:16) 받은 은혜가 넘칠 때, 그 때에 뭔가가 된다. 하나님이 능동인(能動因)이고, 우리는 절대 수동성 속에 있을 때에, 그 때에만 무엇이든지 제대로 된다. 내가 하지 않고 은혜 위에 은혜가 더 할 때에 길이 생긴다.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바깥의 존재요, 희망은 세상 바깥에서 온다.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끼리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실패한다. 성서는 인간 실패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실패하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이야기가 성서이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도 결국 실패하고 남의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그 지역의 신들을 숭배하다가 망했다. 이스라엘의 멸망사를 기록한 열왕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끝내 우상숭배를 끊지 못해 망했음을 보여준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에게서 구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구하지 않는 것은 사람에게서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상숭배는 결국 인간숭배이다. 힘 있는 자에게 아첨하거나 부자를 부러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 모두 우상숭배이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믿고 목이 뻣뻣해지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음이라.”(사무엘상 15:23)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세상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어서 실패한다.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 뭔가 하는 것 같고 뭔가 나아지는 것 같은데, 나아지는 듯 보이는 것 속에는 더 큰 병이 자라고 있다. 세상이 하는 일이 그렇다. 에스겔은 골짜기에서 수많은 뼈들을 보았고,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을 때에 뼈들이 살아 일어나 이스라엘을 재건할 군대가 되는 것을 보았다(에스겔 37:1-14). 사람은 죽고,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의 힘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만이 희망이다. 인간은 절대 수동성에 처하고 하나님이 능동인이 될 때에 새 희망이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크리스마스는 사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실 때에 주어질 새로운 삶과 새 역사에 대한 희망을 전해준다.
둘째,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성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한 사람들 얘기를 전하고 있다. 목자들과 동방박사, 그리고 제사장 사가랴 부부이다. 이들은 신분이 다르고 생활 수준도 다르지만 모두 낮아진 사람들이다.
누가복음은 천사로부터 크리스마스 소식을 들은 목자들 얘기를 전한다(누가 1:8-20). 그들은 성 바깥에서 양을 치고 밤에는 양들과 함께 들에서 잔다. 그들은 따뜻한 방에서 자지 못하고 한 데서 자는 바깥의 사람들이다. 일용직 노동자들인 그들은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이요, 그래서 성 안의 사람들에 비해 뒤떨어진 사람들이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에 속해서 낮아진 사람들. 신분이 낮아서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에게 희망을 두기 어려운 사람들이요, 하나님에게 희망을 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희망의 소식을 제일 처음 들은 사람들이 되었다. 낮은 사람들인 목자들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 탄생의 어마어마한 소식을 들었다.
모두가 자고 있을 때에, 세상은 모르고 있을 때에 목자들이 크리스마스의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곧바로 성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찬양한다. 최초의 찬양자들이다. 성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희망을 맞이하려면 목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성 안에 살면서도 성 밖의 사람이 될 줄 알아야 하고, 주류에 속했어도 비주류가 될 줄 알아야 하고, 높임을 받아도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 속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인 목자처럼 시시때때로 사람들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목격한 또 다른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다. 그들은 별을 보고 찾아와 아기 예수에게 귀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했다. 가난한 목자들은 최초의 찬양자요, 부유한 동방박사들은 최초로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다. 자기들 방식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었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계시에 순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문명이 발달한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인데, 세상을 구원할 진리를 자기 나라에서 찾지 않고 하늘의 계시에 순종해서 유대 나라까지 왔다. 대도시에 살던 그들이 작은 나라의 시골 베들레헴에까지 왔다. 그리고 마치 로마 황제를 알현하듯 값진 예물을 드려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들을 낮추었다.
동방박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유대인들 기준에서 보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이교도들이다. 그 점에서 그들은 목자들처럼 바깥사람들이다. 성서는 집안이든 민족이든 인종이든 사람들이 끼리끼리 뭉쳐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을 싫어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여리고로 들어갈 때에 여리고의 토착민인 라합이 도왔다.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나오는 라합이 이방인이었듯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아보고 경배한 동방박사도 이방인이었다. 사람들이 바른말 하는 선지자를 죽여서 씨가 마르고 제사장들이 타락하여 교만해 질 때에 그리스도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겸손함은 외부에서 찾아야 될지 모른다. 마태복음은 그 점을 말하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은 제사장 사가랴 부부 얘기를 전하고 있다.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이요, 남에게만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부터 계율을 잘 지킨 사람이었다(1:6). 아마 누가는 사가랴의 얘기를 적을 때에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와 대치되는 구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는 나라가 망할 때의 문서인데, 거기에 나오는 타락한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이스라엘의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서 세상의 죄를 사함받도록 간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인데, 자신의 배를 불리며 영혼 구원을 미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많다. 우상숭배를 막아야 할 자들이 스스로 앞장 서서 우상숭배자가 된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전 앞마당까지 밀고 들어온 신상들과 그것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탄핵하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에스겔 8장). 세상 죄의 사함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고 재물과 권세를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앞장 서서 짓고 있는 셈이다. 망할 때가 되면 그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는데, 성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할 제사장으로 사가랴가 남아 있음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란 정의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가랴는 제사장 전통을 잇는 정통 유대인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정통이냐 아니냐, 제사장이냐 일반인이냐는 것은 세상에서의 구분이고, 가문 때문에 목을 뻣뻣이 한 채 제사장 노릇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가랴는 자신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더욱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권세가 아닌 자기 권력으로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예레미야 5:30) 큰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흠이 없이 행하더라’(누가 1:6)는 것은 그 점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요한을 잉태하게 되고, 엘리사벳은 그리스도의 잉태를 제일 처음 알게 된다.
목자와 동방박사 그리고 제사장 사가랴는 처한 위치가 달랐다. 목자들은 가난한 주변인이었고, 동방박사들은 이교도 지식인이었고, 사가랴 부부는 정통 유대인 제사장이었다. 지구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처한 위치가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어느 위치에서나 자기를 낮추는 자들이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것이다.
셋째, 크리스마스는 정치에 대한 경고이다.
마태복음의 크리스마스 얘기에는 헤롯이라는 정치인이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탄생은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로 정치인이 다스리는 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가 서서히 성장해 갈텐데, 그러므로 정치권력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국가는 종종 부딪힐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국가가 필요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국가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른다.
헤롯 대왕의 등장 때문에 누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에는 예수 탄생의 풍경에 험한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다. 헤롯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찾아 죽이려고 했다. 동방박사들에게 베들레헴에 가서 메시아 탄생을 확인한 후에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했다. 자기도 경배하기 위해서라고 거짓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동방박사들이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중에 속았다는 사실을 안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근처에서 두 살 밑의 아이들을 모두 죽였다(마태 2:1-18).
크리스마스 때에 아이들의 집단 학살 이야기가 나오고,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다니. 성서는 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을까? 헤롯은 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을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에 주목해야 한다. 동방박사들이 예수살렘에 도착해서 찾은 것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태 2:2) 엄연히 헤롯이 유대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 유대인의 왕을 다른 데서 찾는다. 헤롯이 그 얘기를 들었고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2;3). 누가복음에도 가브리엘 천사가 태어날 아기 예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누가 1:33).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곧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는데, 오직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네 말이 옳도다”는 짧은 말로 답하셨다(마가 15:2).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에 박힌 명패 역시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렇게 보면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유대인의 왕으로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헤롯 앞에서 유대인의 왕을 찾으니 헤롯이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헤롯은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를 도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한 사람이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마침내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의 신임을 얻고 유대 나라의 확고한 통치자로 입지를 굳힌 사람이다. 왕이 되기까지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 있었다. 정치권력을 얻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죽을 고비를 몇 번 씩 넘기며 권력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얻은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음모를 꾸며 정적을 죽이거나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일은 인간사의 흔한 일이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없애기 위해 헤롯이 살인을 서슴치 않은 것은 이 천년 전의 일일 뿐 아니라 오늘날의 권력투쟁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고, 유대 나라의 일일 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숱하게 확인되는 일이다. 사회가 위기에 처하면 정치는 누군가의 피를 흘려 사회를 안정시킨다. 진실을 감추고 피 흘리는 일은 정치의 속성이다. 위기가 클수록 희생되는 사람도 많아지고, 위기가 극대화되면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땅을 적신다. 전쟁도 정치의 수단이다. 헤롯이 대량 학살극을 벌인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온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나라의 모순과 위기가 극대화된 때에 민심을 가라앉히고 사회의 안정을 꾀하는 정치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렸을까? 세상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 3:16)는 성서의 메시지와 어긋나지 않는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더라면 헤롯이 정적으로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은 정치적 통치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유대 나라는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된 나라이다(출애굽기 19:6). 제사장 공동체란 온 인류의 죄를 인식하고 세상과 구분되어 하나님과 통하며 인류의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예배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원래 정치공동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모세가 지도하는 신앙공동체로 출발했다. 정치권력자가 등장해서 국가가 세워진 것은 사울 때부터이니 한참 후이다. 국가가 세워진 후에 정치공동체로서의 성격만 강화되고 신앙공동체의 성격이 약화되면서 이스라엘은 존재이유가 없어져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서의 시각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에 물들지 않는 진정한 예배공동체를 가리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도 그 의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헤롯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정권을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셨다(요한 6:15). 그리스도의 나라는 정치적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통치하는 방식으로 사람 마음에 속에 있을 것이다(누가 17:21). 사람들을 변화시켜 세상 나라의 정치에 종속되지 않게 할 것이다. 정치에 종속되지 않아야 세상 권세에 매이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다.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정치적 발언을 할 수도 있지만, 정치에 빠지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정치에 빠지거나 정치에 휘둘리면 안 된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는 헤롯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정치인뿐 아니라 온 세상이 정치에 몰입하고, 제사장들도 정치에 물들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정치가가 아닌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부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다. 세상 나라의 정치에 몰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치에 몰입하는 세상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모르고 서로 피를 보면서도 싸움을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피 흘리는 세상을 막으려고 오셨다. 고대사회에서 단골로 희생제물이 되었던 아이들. 헤롯은 정치적 전통을 따라 유아살해를 저질렀고, 예수는 아이들을 특별히 높여 대우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피를 흘리며 쉽게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는 나라이다. 그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무고한 자들의 희생의 피로 굴러가는 정치공동체인 국가와 다르다.
정치는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가 될 수 있으며 어쩌면 사탄의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른다. 통치자가 헤롯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이 되고 교회를 건축하며 기독교에 특권을 부여했을 때에, 로마제국을 하나님 나라처럼 보고 황제를 떠 받드려는 움직임이 교회 내에서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기준으로 삼아 제국 신학에 반대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같을 수 없음을 명확하게 한 것이요, 그것이 기독교의 정치철학이 되었다. 교회는 정치에 빠지면 안 된다.
성서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정치에 대한 경고와 정치에 몰입하는 세상에 대한 경고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