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에 들어서자마자 미군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고 그 나라 대통령 부부를 체포하여 미국으로 이송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은 그린랜드를 미국 땅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지구촌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다니엘서의 얘기가 떠올랐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6세기에 유다 나라를 멸망시킨 느브갓네살 2세가 통치했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다니엘서에서 가장 유명한 얘기는 유다에서 포로로 끌려간 청년 다니엘이 사자 굴과 불도가니 속에서 살아난 이야기이다. 그런데, 다니엘서에는 성서의 폭넓은 시각을 보여주는 측면에서 매우 감동적인 얘기가 들어 있다.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데, 느브갓네살 왕이 교만함으로 쫓겨나 고난에 처해졌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겸손해진 후에 왕좌로 복귀한 이야기이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룬 느브갓네살 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지중해 연안의 지역과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당시 최대 영토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성서에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나오는 갈대아(칼데아) 출신으로서 유프라테스강의 물길을 돌려 바빌론이라고 하는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인구 수십만이 살던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성벽 위에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양방향으로 달릴 수 있는 정도의 넓은 길이 나 있을 정도로 성벽은 두껍고 튼튼했다. 동쪽 성문인 이슈타르의 문은 푸른 타일로 꾸며진 아름답고 거대한 건축물로서 베를린의 페가몬트 박물관에 일부 복원되어 있다. 물을 끌어 올려 식물을 재배한 대규모의 불가사의한 공중정원을 설치한 것도 이때이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최고 신 마르둑을 모시기 위해 높이 90미터의 탑을 만들고 그 위에 신전을 조성했던 것도 느브갓네살의 통치하에서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바빌론의 웅장한 건축물과 문화의 융성함에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가들은 느브갓네살을 가장 위대한 정복자 중 하나로 꼽는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가들의 평가일 뿐, 성서의 시각은 다르다. 성서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술잔으로 묘사한다. “바벨론은 주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예레미야 51:7) 금으로 치장한 화려한 제국의 수도 바빌론은 술을 담고 있는 술잔이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 술잔에 든 술을 마시고 미쳐버렸다. 이 말씀은 세상이 바빌론을 부러워하며 힘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힘으로 정복하여 부를 일군 바빌론의 제국주의가 세상 민족들의 모델이 되면서 너도 나도 따라 하느냐고 다같이 죽는 줄도 모르고 힘겨루기에 나서니 미친 세상이 되었다. 바빌론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바빌론이 정복의 신 마르둑을 앞세우며 부를 끌어모아 금빛을 내며 자기 힘으로 세상 위에 군림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 손안에 있는 금잔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언제든 손 안의 잔을 던져 버릴 수 있으니, 바빌로니아의 제국주의가 끝나고 다른 세상이 올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무조건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바빌론의 왕 자신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좋은 곳에 힘을 쓰는 평화의 수호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고난받는 느브갓네살의 얘기에서 그런 성서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느브갓네살은 왕궁의 옥상을 거닐면서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큰 바벨론은 내 왕궁으로 쓰기 위해 내 능력과 권세로 지었으니, 내 나라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는구나.”(다니엘 4:30) 내 능력, 내 권세, 내 나라, 내 영광. 그런데, 이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명하노니, 이 나라의 왕권이 네게서 떠났느니라.”(4:31)

왕은 곧 궁에서 쫓겨나 들에 살며 소처럼 풀을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고 머리칼이 독수리 깃털처럼 길어지고 손톱은 새의 발톱처럼 자라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7년이 지나고 마침내 느브갓네살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며 제정신을 찾았다. 개역 성경에는 ‘총명이 다시 돌아왔다’고 번역되어 있는데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정신을 차린 느브갓네살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다. 그걸 아는 게 제정신이고, 자기가 싸워 쟁취한 것이라는 이유로 나라가 자기 것이라고 여겨 자기 능력에 도취되면 제정신을 잃은 것이다. 제정신이 돌아온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권세가 영원하며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대대에 이른다고 찬양한다. 그때에 고관들이 그를 찾아나서 들에서 발견하고 그는 왕좌에 복귀하였으니, 이전보다 더 위대하게 되었다.(4:32-37)

2천 5백년 전의 문서치고 성서만큼 알기 쉬운 말을 사용해서 일관되고 분명한 어조로 권력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문서는 없을 것이라 본다. 대제국을 건설한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힘과 영광에 취할만하다. 그렇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신의 말 한마디로 세계 최대의 도시가 건설되고, 말 한마디로 한 나라를 없앨 수 있고,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목숨 걸고 싸워서 이룩한 제국인데, 어찌 영광의 자리에 앉아 호령하며 누리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외없이 누구라도 자신의 업적과 영광에 도취되는 순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길로 가는 것임을 성서는 말한다. 자기 힘을 두려움없이 과시하는 순간, 그의 권위와 힘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통치의 자리는 영광과 권세의 자리이다. 그러나 온 민족이 두려워하며 신처럼 떠받들 때에, 사람이 주는 그 영광과 권세에 취하면 그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느브갓네살은 사람들의 환호와 높임에 취했다가 들에서 7년을 보내며 사람들의 기운을 모두 버리고서야 자신의 영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다. 모세가 왕궁을 벗어나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고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지도자가 되었듯이, 정치인 느브갓네살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새로운 지도자로 거듭나는 데에는 왕궁 바깥의 들에서 짐승과 함께 지내는 세월이 필요했다.

사람이 주는 영광을 잃고 산 지 7년 만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땅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4:35)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능히 낮추시느니라”(4:37)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를 분명히 인정한다. 통치자가 갖는 권세와 영광은 세상의 주인인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느브갓네살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주셨다”(5:18) 정치인에게 신앙의 의미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아는 데에 있다. 기독교인들이 외우는 주기도문의 끝부분은 성서에서 나온 정치철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치는 사람의 얘기를 듣고 사람에게 잘 보여야 되는 일이다. 민심을 얻어야 선거에서 이기고 정권을 차지하며, 민심을 거역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잘 보이기 전에 하나님에게 잘 보여야 한다. 두 가지는 꼭 충돌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일일 때도 많다. 느브갓네살의 교만을 질책하고, 7년 동안 권력의 때를 벗는 기간을 요구한 성서는 큰 힘을 갖는 정치인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정치는 정치의 논리가 있지만, 정말 정치적인 논리에만 충실할 때에, 정치권력은 수많은 사람의 피로 이 거룩한 땅을 적시게 된다.

미국이 전투기 150대를 동원해 베네수엘라를 공습하고 특공대를 침투시켜 대통령 마두로 부부를 체포한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경호원들은 물론이고 민간인들도 많이 사망했다. 민간인들의 사망 숫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군 병사 중에 사망자가 없음을 즐거워하며 완벽한 작전 수행을 자랑했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대통령의 입에서 민간인 희생에 대한 유감의 표시는 없었다. 그는 방송국에 나와 TV 쇼를 보듯 작전 수행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공표했다. 그리고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들어가 세계최대 매장량을 가진 베네수엘라의 유전을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대체로 이번 사건에 대해 호의적인 것 같다. 라틴 아메리카에 영향력을 넓히는 중국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주권국가에 대한 폭력사용의 문제가 도덕적으로 문제될 수 있음을 느끼면서도 미국의 안위를 위해 불가피했고 미국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잘 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1월 6일의 공습은 결정자인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성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두로의 체포를 보며 일차적으로 드는 생각은 인간의 실패였다. 미국 대통령의 성공이요 미국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좀 더 큰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실패다. 사람은 평화를 만들 능력이 없구나. 그렇게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무력을 과시하고 수많은 생명을 잃어야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평화를 위해서 대지를 피로 물들여야 하는 게 인간 현상이라면, 인류라는 종의 실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이 땅을 적시고 있는 수많은 어린이와 무고한 시민들의 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성서는 땅을 적신 피의 울부짖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세기 4:10) 가인의 후예들을 향한 말씀이다.

물론 정치는 선이냐 악이냐 보다는 유능하냐 무능하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도덕적으로 악한 것보다 더 나쁜 건 무능한 것일 수 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악한 짓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게 정치이다. 국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기로 했으면, 무모하고 때로는 잔인해 보이더라도 빠른 결단과 실행에 옮기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피를 보는 게 꺼림칙해서 머뭇거리다가 문제를 해결할 시기를 놓치고 더 큰 비극과 살상을 불러 올 수도 있다.

정치를 윤리와 분리하는 시도는 이미 16세기에 마키아벨리의 책 『군주론』에서 이루어졌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도덕성에 묶어 두려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정치철학에 반대하며,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바탕을 두고 정치를 바라보았다. 정치를 철학과 신학에서 분리시켜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데에 선봉에 선 사람이 마키아벨리이고, 그가 현대 정치사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대로 마키아벨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았다. 성서와 기독교는 정치가 이루고자 하는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는 억압과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뜻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와 국가를 죄의 산물로 보았다. 정치에 수반되는 억압과 폭력은 악이지만 죄의 필연성에 빠진 인류라는 종의 보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정치와 국가체제는 필요악(malum necessarium)이다. 이른바 정치적 현실주의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의 힘을 냉철하게 과학적으로 바라 본 기독교의 산물이다. 덕의 정치를 지향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나 공맹의 인문주의에서는 나올 수 없었던 정치철학이 정치적 현실주의이다. 루터나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듯이 마키아벨리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속에 있었던 중세 아퀴나스에게서 벗어나 아우구스티누스를 되살린 사람이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정치적 현실주의뿐 아니라 이상주의도 함께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억압과 폭력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종교이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현실주의 뿐 아니라 헤겔의 이상주의도 기독교의 산물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 이상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로 구현되리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정치사상의 뼈대를 이룬다. 그래서 헤겔의 법철학 같은 낙관적인 이상주의 정치사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현실주의가 없는 이상주의는 악의 힘을 얕잡아 보다가 히틀러 같은 괴물의 등장을 막지 못하고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반면에 이상주의가 없는 현실주의는 정치적 살인과 국가 폭력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결국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들 것이다.

지금도 국제사회가 약육강식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여러가지 금기와 인권의식과 국제법의 감시로 약자의 희생을 많이 막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면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다. 동물의 세계와 달리 인간세상에는 대량학살과 인종청소와 민족말살이 벌어지고, 보복과 복수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종의 멸망이 초래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정치 현실을 필요악이라고 말했다. 필요하지만 악이므로 정치적 폭력을 줄이고 없애나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희망과 믿음이 그 길을 이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왕국설은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공존을 말하는 것으로써,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두 날개를 모두 가져야 함을 말한다. 한편으로 힘의 현실을 인정하고 자기를 지킬 힘을 길러야 하며, 동시에 힘을 숭배하지 않으며 선의를 확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전자는 시키지 않아도 인간이 본능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고, 후자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특별히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맡은 몫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세상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데에 있다.

미국 대통령이 금기를 어기는 게 마음에 걸린다. 너무 공공연하게 힘의 우위를 자랑하고, 예측불가능한 태도로 약속을 뒤집으며 금전 제일주의를 지향한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에도 금기가 있는데, 현재의 미 행정부 지도부는 지금까지 인류가 건너지 않으려고 조심하던 선을 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흐름 뒤에는 대통령 개인의 자기도취가 있는 것 같다. 자기 이름을 높이고 좋은 곳이라면 아무 데나 자기 얼굴과 이름을 집어넣는 것을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도취된 것 같다. 본인은 기독교인임을 내세우지만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다.

미국이 잘 되기를 바라지만, 리더십이 정화되어야 할 것 같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대로에서 확인하는 일들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손안의 금잔으로 비유된 바빌로니아처럼 미국은 세계를 미쳐 돌아가게 만드는 데 앞장서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때에는 성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 잔을 던져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