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중앙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다가 김옥균의 글씨를 보았다. 종이가 누렇게 바랬는데,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이 당시에 자기를 도와준 일본인에게 써 준 글씨라고 한다. 그걸 받은 일본인의 후예가 한국에 기증해서 걸리게 된 모양이다.

색이 바랜 종이 위의 글씨는 운산호측(雲山浩測). “구름 낀 산, 크고 깊구나.” 라는 뜻이다. 목숨을 건 거사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피신한 당시의 심정을 그린 글씨 같다. 높은 산은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이요, 거기에 구름이 끼었으니 잘 보이지 않는다. 맑은 날에도 큰 산에 오르는 일은 쉽지 않은데, 구름에 가려 산의 형체조차 잘 보이지 않으니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 없구나. 이루고자 했던 목표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

나라를 개혁해 보겠다고 일어선 이십 대 청년들의 혁명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 뿔뿔이 외국으로 흩어졌고, 그 수장 격인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구한 말에 민생은 파탄 나고,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살던 조선에 외국 세력이 밀어닥치면서 나라가 통째로 흔들릴 때이다. 혁명은 대의를 품은 똑똑한 젊은이들이 꿈꾸어 볼 만한 일이었으나, 가장 아쉬운 점은 그들이 일본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 이후 외세 의존은 국가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고종과 민비는 일본군을 누르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다시 청나라를 누르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는 난국이 지속되었다. 정부는 내부의 혁명 세력인 동학 농민들의 제압을 다시 청나라에 의지하였는데, 일본도 뒤따라 들어오면서 청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승리했다.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임진왜란 때에 죽은 조상들의 원수를 갚는다며 반일을 내세워 궐기했으나, 낫과 곡괭이를 든 농민들 수 천 명이 단 한 나절만에 우금치에서 일본군 기관총에 몰살당하고, 전봉준은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후에 고종은 러시아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이 유명한 아관파천이다.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에 이완용이 그 일을 주도했다. 아관파천으로 힘을 얻은 러시아는 차츰 조선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이권을 요구했다. 그러자 고종은 미국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때에 이완용도 고종의 지시로 미국을 방문하고 발전된 문물을 보았다. 이완용은 그때까지만 해도 출세 지향적이기는 했지만 친일과 거리가 멀었고 친미에 가까웠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과 힘을 합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2대 위원장을 지내면서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거처를 덕수궁으로 옮기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극적이었고,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자 이완용은 친일파로 변하고, 나라는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김옥균과 서재필 박영효 등의 청년 지식인들이 일으킨 거사는 조선을 근대적 민주 국가로 만들려고 한 첫 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갑신정변은 인류 정신의 진보와도 맞물리는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었으나,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황은 이후 국내의 각기 다른 정파들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외세에 맡겨지는 시발점이 되었으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김옥균은 친일 인사였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망국의 친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갑신정변이 외세 의존의 시발점이 된 면이 아쉬울 따름이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다시 청나라로 피신했다가 고종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죽었다. 정부의 전복을 시도한 대역죄인으로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렇지, 그렇게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지. 이런 삶 저런 삶들이 있다. 오늘 나는 이 땅에 살았던 한 사람의 고뇌가 담긴 글씨를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의 인생은 순간이었지만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는가.

또 하나의 글씨가 있었다. 김옥균의 글씨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세로로 걸린 족자 안에 들어 있다. 용공난용연포기재(庸工難用連抱奇材). “재주 없는 장인은 아름드리 통나무와 기이한 재목을 잘 다루지 못한다.” 여순 감옥에서 일본 간수의 요청으로 써 준 글씨라고 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이 글씨는 무슨 뜻으로 썼을까? 자신의 큰 뜻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리라는 의미일까? 천주교인으로서 살인하는 것은 큰 죄임을 잘 알았던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총으로 죽이기까지 얼마나 큰 번민이 있었을까? 그 사건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안중근을 제적시켰고, 그가 복권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열강의 침략 속에서 허우적대던 이름 없는 작은 나라 조선의 청년 안중근은 국제사회에서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는 『동양 평화론』을 저술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저격은 21세기부터 갑자기 등장한 테러 행위와 분명히 다르다. 안중근은 처음에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선전을 믿었고,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이 앞장서서 아시아 나라들을 보호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의 확장된 군비가 그 공격 대상을 아시아 나라들로 삼았을 때에, 일본은 평화를 깨는 침략자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 때에 안중근은 아시아와 인류 평화의 이름으로 침략의 선봉에 선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10년 10월 26일 하얼삔 역에서 울려 퍼진 총소리는 단순히 한 청년의 민족주의나 나라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총소리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질식사할 지경에 처한 인류애가 폭발하여 터져 나온 소리이고, 평화를 해치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혀진다는 철학적 신념에서 나온 소리이다.

안중근의 고뇌의 여정을 보면, 2차 대전 당시에 히틀러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던 본회퍼 목사와 비슷하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생명의 귀함을 알았고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지만, 버스 안의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미친 버스 운전사를 제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암살을 감행하고자 한 것이다. 안중근과 본회퍼 목사는 야욕이 낳은 전쟁과 파괴로 인간의 피가 대지 위에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에 살았다. 안중근은 본회퍼 목사보다 삽 십 여 년 앞서서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 문제로 고민했고, 고민의 결과에 자기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김옥균과 안중근. 모두 풍전등화에 처한 조선 말기에 살면서 나라의 고난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친일파요 또 한 사람은 친일파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지만, 그것은 상황의 차이에서 생긴 결과일 뿐, 그들의 목표는 같았다. 공동체의 운명을 피해 숨거나 안일을 꾀하지 않았다는 점, 비극의 파도를 타기 시작한 공동체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삼고 어떻게든 자기 역할을 다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똑같다.

지금 세상은 19세기 말만큼이나 뒤숭숭하다. 열강의 각축으로 전쟁을 거듭하던 100년 전처럼 오늘날 강대국들이 다시 영토 확장과 부국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AI가 몰고 올 변화는 예측 불가능하다. 인류는 이미 예측 불가능한 길로 들어섰으며, AI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기계의 탄생. 그것은 결국 자기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작품이다. AI 가 전쟁에 도입될 때에 어떤 일이 발생할까?

18세기 말에 칸트는 전쟁이 났을 때에 인간이 얼마나 파괴되는지 목격했다. 국민당과 내전을 치렀던 중국 공산당의 한 인물은 “전쟁 중에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라는 말을 했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철학적으로 확립한 후에, 전쟁을 막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나면 인간의 존엄성이란 사치스런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구평화론』은 그런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평화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책에서 칸트는 개인 각자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할 수 없듯이 한 나라의 주권을 다른 나라가 침해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면서 그는 전 세계가 연방제의 형태를 취해 하나의 나라가 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별 국가의 불법적인 침략을 통제할 수 있는 연맹 체제의 국제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칸트의 주장은 1차 대전 후에 국제연맹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2차 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칸트의 새로운 제안은 국제 연맹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하늘을 향해 회개하는 대회를 열자고 주장했다. 종전이 된 후에 이긴 나라는 승리의 축제를 열고 진 나라는 절망과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인간 현상이다. 그러나 승자든 패자든 민중들은 전쟁이 끝난 것 자체를 감사한다. 그때에 감사와 함께 거국적인 회개의 제의를 하늘에 올리자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야만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에 대해 하늘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회개.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생각과 신념을 뒤집는 주장이다. 전쟁에서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영웅 대접을 받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던지 사람의 피가 대지 위에 강물처럼 흐르게 한 것 자체에 대해 다같이 모여 회개하자는 것은 역사에 반하는 일이다. 역사를 거꾸로 가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역사의 진보를 향한 발걸음이다. 칸트는 루터에게서 물려받은 기독교의 죄의식을 바탕으로 인류의 감정에 호소하며 평화의 휴머니즘을 세우고자 했다.

칸트가 주장한 거국적인 회개의 대회. 한번 시도해 볼만하지 않은가? 어디선가 시작되면 전 세계로 번질 수 있을 것 같다. 국가가 못하면 교회에서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교회는 평화를 위해 정치와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데에 그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 시대에 태어나 고뇌에 찬 길을 걸었던 김옥길과 안중근의 글씨를 보자니, 오늘날의 시대가 백 년 전과 비슷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서의 예언자의 위치에서 외친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절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