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은 꽤 추웠는데, 북극에서 내려온 차가운 기단이 한반도를 덮고 있는 기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하늘이 심술을 부리니 삼한사온도 없어진 것 같다. 어린 시절에 아무리 추운 날에도 나가 노는 일은 빠지지 않았는데,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추운 날은 별일 없으면 나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어느새 입춘이 지나고 겨울도 끝나가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도 그 속에 온기가 느껴지는 걸 보면, 봄이 오고 있다. 대세라는 말이 어울린다. 대세는 기울었으니 겨울을 밀어내고 봄이 그 자리에 들어 오고 있다. 해도 분명히 길어져서 발코니의 블라인드를 치고 실내 등을 켜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봄이 올 때 즈음이면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십일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때이므로 중세에는 사순절에 고기와 치즈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고기를 안 먹고 사십일을 버티기 위해 사순절 전날에는 마음껏 고기를 먹는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 수요일이므로, 사순절 전날은 화요일이다. 그래서 사순절 전날을 프랑스어로는 마르디 그라(mardi gras)라고 부른다. ‘기름진 화요일’이라는 뜻이다. 고기만 먹는 게 아니라 온갖 치장을 하고 진탕 노는 축제가 벌어진다.
예술의 기원은 축제에 있고, 축제의 기원은 종교에 있다. 기독교의 마르디 그라 이전에도 인류에게는 축제가 있었다. 축제는 신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의의 일부였다. 그것은 잔치라기 보다는 인류라는 종의 보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공동체를 위한 제물을 바치기 직전에 사람들이 한바탕 뒤집어졌는데, 그것은 성(聖)과 속(俗)의 경계선에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아슬아슬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축제가 폭력으로 바뀌면 마을은 멸망한다.
성스러움은 질서이고 평화이며 생명이다. 속됨은 무질서이고 폭력의 혼란이며 죽음이다.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일은 질서를 위한 성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싸운다. 일상사는 늘 상호 폭력에 노출되어 무질서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래서 속된 세상은 혼란의 위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성스러운 제의가 필요했다. 제의의 핵심은 모두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는 속죄 제물이었다. 그리하여 희생 제의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넘어가고, 폭력에서 평화로 넘어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종교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우주 탄생의 비밀은 종교에 있다. 물리학에서는 빅뱅을 말하지만, 인류학에서는 종교를 말한다. 인간사회의 탄생은 종교와 함께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축제는 희생 제의의 전반부를 장식한다. 용납된 뒤집어짐이 축제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축제의 테마는 괜찮은 정도의 무질서이다. 축제 속에서 기존 질서가 파괴된다. 사람들은 분장과 가면을 통해서 정체를 숨긴다. 성과 이름을 바꾸고, 어른과 아이가 뒤바뀌고, 남녀를 바꾸고, 양반과 상놈이 뒤바뀌고, 사람과 짐승이 뒤바뀐다. 옷을 벗기도 하고, 요란한 색깔의 옷을 입기도 하고, 평소답지 않은 이상한 몸짓을 한다. 점잖지 않은 소리를 내고 노래 부르며,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도발적인 노래를 부른다. 질서와 평화를 위한 엄숙한 금기를 깨는 것이 축제에서는 허락된다.
축제에서 위아래가 없어지고 문명과 자연의 경계가 없어지는 무질서를 고조시키는 것은 인간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는 성과 속의 차이를 기준으로 각종 차이와 차별을 통해 인간관계에 거리를 만든다. 거리를 둠으로써 경쟁을 원천적으로 막고 부딪힐 일을 만들지 않는다. 위계질서를 깨는 것은 인류 역사 최대의 금기였다. 그러나 차별로 인한 불만은 잠재적 폭력을 형성하고, 같은 신분 내의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경쟁 역시 공격성의 증가와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 점에서 인간 사회는 언제나 카오스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카오스는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고, 공동체의 붕괴는 종의 멸망을 의미한다.
카오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희생 제의이고, 희생 제의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축제였다. 축제를 통해 사람들은 차별의 질서를 뒤집는다. 상놈이 양반이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하고, 종이 주인이 되는 신분 역전의 드라마가 벌어진다. 연극과 드라마와 노래와 춤과 각종 대사가 여기에 동원된다. 그리고 평소에 금기시되었던 경쟁과 힘 싸움이 축제 기간에는 공인되는데, 그것이 스포츠의 기원을 이룬다. 그리스의 올림픽도 올림푸스 신에게 드리는 희생 제의의 일부분으로 거행된 것이다.
축제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질서가 역전되고 분노의 감정과 공격성이 정화된다. 카타르시스는 깨끗해진다는 뜻인데, 축적되었던 공격성이 해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축제는 제한된 시간에 그리고 제한된 장소 안에서만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축제의 무질서는 질서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쌓였던 분노와 공격성이 분장과 춤과 노래와 스포츠를 통해 승화되지 않고 폭력으로 번진다면, 그 축제는 실패작이고 마을에는 흉년이 들거나 재앙이 닥친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축제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선이 주어져 있었다. 오늘날 스포츠의 엄격한 룰과 심판의 권위는 오래된 축제의 금기를 반영한다.
축제에서 풀어준 공격성은 공격성의 고조를 통해 공격성을 해소하는 방식을 취한다. 공격성의 정화는 무질서의 위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 희생제물을 잡음으로써 완성된다. 축제는 무질서의 위기를 고조시킨 후에, 고조된 불만과 분노의 폭력을 희생제물로 선택된 사람이나 동물에게 쏟아부음으로써 공동체의 공격성이 씻겨나가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누가 임의로 고안한 게 아니라 인류라는 종의 보존을 위한 자연선택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등장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생사람을 잡아 그 피를 바쳤던 희생 제의는 십자가의 묵상과 예배로 바뀌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 수많은 희생제물을 대체했다. 자연종교의 희생 제의는 계속 새로운 희생양의 피를 요구한다. 수천수만 년 동안 장애인과 어린아이와 여성과 가난한 자와 포로와 외국인이, 그리고 때로는 추장과 왕들이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자연종교를 대체한 철학과 인문주의 문명도 알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류가 누리는 평화의 상당 부분이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성서는 그 점을 알았고 드러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종교이다. 창세 이후로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내면서 세상의 폭력에 대항한 문서가 성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이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그들의 고통을 짊어지셨다. 그리고 희생양은 특정계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누구나 무고한 자의 피에 굶주린 세상의 희생양들이다. 인간의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의 희생양들이다. 사람들의 죄가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사람을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의 피를 요구하는 죄의 힘 곧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신 사건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한복음 12:29) 그렇게 해서 하늘이 깨끗해졌다.
그 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세상은 여전히 무고한 자의 피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들여다 볼 줄 알게 되었다. 세상은 아직 자신의 죄를 이기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죄가 무언지 알며 슬퍼할 줄 알게 되었다. 십자가 밑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상 삶에서 쌓였던 증오의 감정을 정화한다.
자연종교의 성스러움(the sacred)은 거리두기와 분리와 차별과 희생양을 잡는 폭력을 통해 평화를 만들지만, 거룩하신 하나님(the holy)은 세상을 폭력과 증오의 죄에서 구하심으로써 서로 가까워져도 괜찮은 평화를 만든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요한 14:27).
자연종교가 가져오는 생명은 일부를 계속 죽이면서 얻어지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생명은 다같이 함께 사는 생명이다. 그래서 성스러움(the sacred)은 거짓이고 거룩함(the holy)은 진리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자연종교에서 코스모스의 탄생은 피를 보는 폭력으로 이루어지지만, 기독교는 사랑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우주의 탄생을 본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기독교가 자연종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거짓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스도는 탄식하시며 세상의 멸망을 보셨다. 세상이 저렇게 망하는구나. 그러나 마지막까지 사람을 사랑하심으로써(요한 13:1),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사순절은 세상의 죄가 몰고 올 문명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기간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바라보는 기간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옛 세상이 죽고 새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