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조원경 목사가 지난 3월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좋은 목회자였고, 열정이 있는 수도자였으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학자이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 까랑까랑한 목소리. 신념의 사나이이며 자유인이었던 조원경 목사. 그는 정말 목사였으며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기백배의 인물이었다. 때로는 목사답지 않게 거친 욕설을 퍼붓는데, 사랑에서 나온 것이므로 욕설이 통했다. 그는 분명히 사심이 없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목사였다. 하나님에게 충성하니 사심이 없고 사심이 없으니 우주의 기초인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욕을 얻어먹은 사람들도 그의 욕설이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금방 알았다. 좋은 말로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세상이니, 그의 욕설은 오히려 정신이 번뜩 들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에 거의 빡빡머리에 가까운 헤어 스타일을 하고, 고무신 신고 소박한 옷차림을 한 채 다니던 내 친구 조원경을 가리켜 조폭 두목 같다고 웃으며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불교의 고승과 같았다는 말이 적합할 것 같다. 자유와 사랑이 그를 기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영천의 큰 절인 은해사(銀海寺)의 주지 돈관 스님과 친구처럼 지냈다. 은해사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매우 오래된 절이고, 대구의 동화사와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인 절이다. 조 목사는 석가탄신일이 되면 은해사에 가서 불교 신도들 앞에서 설교했다. 돈관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석가탄신일에 대구에서 열린 불교 집회에 가서 설교했는데 불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기독교 목사가 한복을 갖추어 입고 석가탄신일에 불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마음껏 활용하는 그리스도의 종 조원경의 모습이 그려진다. 몇 해 전에 조 목사가 새로 예배당을 짓고 헌당식 할 때에 내게 설교를 부탁했는데, 많이 앉아야 50명을 넘기기 어려운 작은 예배당에 사람들이 꽉 들어 찼다. 앞에 서서 보니 맨 앞자리에 앉은 건장한 스님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통이 보이고 그 뒤에는 신부와 수녀님들도 있었다. 조 목사가 지역의 종교인들과 두루 알고 지낸 결과인데, 그날 온 스님들은 돈관 스님이 은해사 산하의 절들의 주지 스님들을 교회 헌당식에 참여하도록 호출해서 오게 된 분들이었다. 헌당 예배가 끝나고 마당에서 인사할 때 보니 잘 생긴 젊은 주지들만 불렀는지 인물이 모두 훤칠했다. 돈관과 조 목사의 우정은 교회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기념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조 목사와 돈관의 교류는 하양교회의 역사는 물론이고 한국 교회사에도 남을 만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새로 지은 예배당은 우리나라의 이름난 건축가인 승효상 선생의 작품인데, 평소에 일면식도 없던 조 목사가 어느 날 다짜고짜 전화해서 자기 생각을 말하니, 승 선생이 그 위세에 놀라기도 하고 여기 진짜 목사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조 목사의 청을 수락하고 지어진 것이다. 대구 근교의 작은 동네 하양에 의미 있는 건축물이 세워진 셈이다. 조 목사가 목회하던 하양 교회에는 마당이 있는 작은 한옥이 딸려 있다. 거기서 교인들 친교도 하고 주일에 식사도 하는데, 한쪽 귀퉁이에 작은 방이 있고 조 목사는 그 방을 자기 사무실처럼 썼다. 신학대학원에서 같은 방 친구로 지내고 졸업하면서 헤어진 후 몇십 년 만에 그를 만나러 갔을 때에, 마당을 거쳐 그가 있는 방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만큼 문이 작았고, 방 역시 세 사람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작았다. 거기 앉아 있는 조 목사의 모습은 스님 같기도 하고 선비 같기도 했다. 가운데 찻상 하나 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스님과 같고, 거기 꽂혀 있는 몇 권의 고서를 보면 가난한 선비 같았다. 조 목사는 고서 수집가였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고서를 모았는데, 한 번은 그 고서 중 일부를 처분하기 바래서 마침 내가 알던 분이 광화문 앞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관장이어서 그곳에 꽤 많은 고서를 판매한 적도 있다. 그가 모은 고서에는 중요한 문서들도 많이 포함되었고, 지금은 안동대학교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사실 경상도는 퇴계 선생의 학문이 이어져 내려오는 곳이고, 조 목사는 그런 전통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할아버지도 시골 유학자였던 것 같은데,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가 옥에 갇혔고 거기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옥에 갇히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조 목사의 고모는 노비로 팔려 갔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할아버지는 예수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겼고 조 목사의 아버지가 가난한 형편에 성경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되었다. 조 목사 역시 가난하게 컸는데, 그에게서 보이는 깡다구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풍비박산이 난 집안 내력에 기인한 바가 큰 것 같다. 그는 목회 중에도 지역 어른에게 한문을 배워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것도 집안의 분위기 영향이 큰 것 같다. 예수를 믿더라도 조상들이 탐구했던 진리의 연장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근본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나라얼 연구소를 만들어 경산시의 지원으로 매년 대규모 학술대회를 여는 것으로 이어졌는데, 주제는 죽음과 장례의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몇 십 년 만에 그를 만났을 때에 그는 동네 뒤에 있는 무학산으로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상여집과 상여가 있었다. 영천의 양반 마을에서 헐어 없애려고 한 상여 집은 기와를 올려 지은 번듯한 문화유산이었다. 조 목사는 사비를 들여 그것을 사서 트레일러를 불러서 길도 잘 나지 않은 무학산 중턱에 옮겨다 놓았다. 상여집 비용보다 운반 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시도할 수 없는 일을 해 놓고 그는 매우 흐뭇해 했다. 옮겨 놓은 상여집은 조 목사의 노력으로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자칫하면 중요한 문화유산이 하나 없어질 뻔 한 셈이다. 그렇게 역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10년 이상 이어지는 학술대회는 지역의 큰 행사가 되었다. 어느날 조 목사는 자기가 마련한 기도실에 가 보자고 했다. 영천 지역의 어느 산 꼭대기에 방 하나짜리 시골집을 사고 그 뒤에 정자 같은 작은 기도실을 지었다. 너무 지대가 높고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하튼 조 목사는 매우 흡족해 했다. 주일 예배가 끝나면 종종 그곳에 가서 머무르며 기도하곤 했던 모양이다. 조 목사를 옆에서 도우며 우정을 나누었던 부산의 박 목사 얘기를 들으니, 조 목사가 올 초에 그곳에 가 있다가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거기서 비롯된 것 같다. 사망 원인이 급성 폐렴이니 말이다. 내 사정으로 몇 년간 그를 보지 못했는데, 마음 속에 두었던 귀한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의 유골은 자기가 지어 놓고 좋아하던 기도실 옆에 묻혔다. 그를 사랑하던 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과 언어가 장례 예배를 채웠다. 벚꽃이 화사하게 핀 공원을 걸으니 하얀 꽃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렇게 꽃이 떨어졌다. 바람이 불고 아름답고 큰 꽃이 떨어졌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 3:8) 내 친구 조원경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