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러시아 정교회의 음악을 자주 듣는다. 정교회는 설교보다는 의식이 많고, 예배 의식도 주로 일어서서 노래로 하는 것이 많다. 그만큼 음악이 발달되어 있다.

음악 위주의 예배는 신학과도 관련이 있는데, 정교회의 신학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비하면 신비주의적이다. 그들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지 않고 성부의 영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면 그만큼 성령은 역사성을 띠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성령(the Spirit)은 내재하는 평화의 영으로서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정신(sprit)을 형성한다. 헤겔이 성령을 정신으로 바꾸어 역사 내재적 변증법의 철학을 전개했던 것도 개신교 신학의 영향이다. 그러나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는 성령을 성부의 영으로 봄으로써 절대 초월자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예배의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해서 예배가 하늘을 향한다.

신학의 차이 때문에 정교회의 예배음악도 별 관심을 두지 못했는데, 요즘에는 신비적인 정교회 음악을 즐겨 듣는다. 세상이 혼탁해서일까? 일단 세상을 벗어나 공중에 울려퍼지는 찬양의 소리를 듣고 싶다. 인류의 집단적 죄의 힘이 세상 풍조가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 곳도 바로 공중이니까 말이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가리켜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40년 전 유학 시절에 러시아 예배음악을 들으며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젊은 성 베드로 교회’(St. Pierre le Jeune)에서 있던 일이다. 그 교회는 알프스 이북의 가장 오래된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는 고색창연한 교회였다. 마침 고르바초프의 페레스로이카 바람이 불면서 러시아 합창단이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했다. 남성 중창단이 노래하는데, 베이스 저음의 소리와 테너의 고음이 어울리며 거룩하고 신비한 종교음악의 정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러시아 예배음악에 뒤이어 영화 대부(God Father)에 나오는 주제곡 모음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방을 꽉 채운다. 천상을 향한 예배음악과 달리, 대부의 주제곡들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삶의 고뇌와 사랑을 그린다. 뭔가 과거의 시간으로 한없이 끌려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영화 대부가 나의 청년 시절에 남긴 강렬한 인상 때문일까? 아마 70년 대에 광화문 사거리에 있던 국제 극장에서 관람했던 것 같다. 목숨을 건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아내는 이들, 강인함이라는 보호막 사이사이로 보이는 행복한 웃음과 사랑, 그러나 냉철함을 잃었을 때에 틈을 타고 들어오는 파멸의 힘과 복수의 세력, 그래서 왕국을 위해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되는 냉혹한 진정성. 냉혹하지만 잔인하지는 않으며, 그래서 냉혹한 진성성에는 나름의 진실과 영광이 있다.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사는 사람들을 묶어 주는 진실과 영광. 그러나 언제나 닥칠 수 있는 파멸의 위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왕국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몸에 밴 냉혹한 진성성으로는 지켜낼 수 없는 최후의 사랑. 외로움과 비극과 죽음. 영화 대부는 마론 브란도가 나오는 1편의 첫 장면부터 알 파치노가 의자에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3편의 마지막 장면까지 완벽하다.

연주되는 음악은 인생의 흥망성쇠, 영광과 절망이 모두 들어있는 대 서사시이다.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많은 사연이 음악의 멜로디 안에 담길 수 있을까? 연주는 트럼펫 독주로 시작된다. 어둡고 차가운 얼굴을 한 채 홀로 서서 연주하는 남자에게서 나오는 트럼펫 소리가 영화 대부에 나오는 모든 얘기를 압축한 서막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Nino Rota의 작품이라고 했지. 유학 시절에 로마에 놀러 갔을 때에 열정적이고 시원시원했던 로마의 남자들은 전차 경기장을 달리던 그들의 조상을 닮은 것 같았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또 다른 남자의 트럼펫이 여성의 만돌린과 함께 빚어내는 사랑의 테마에는 아름다운 슬픔이 담겨 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부가 된 동생 마이클에 대한 열등감 속에서 조직을 배신했다가 결국 동생에 의해 차가운 호수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형 프라도. 그 프라도를 닮은 남자가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영화 대부의 많은 장면들이 내 앞에 스쳐 지나가면서, 지난 삶의 여정이 보편적 감정의 언어로 함께 흘러간다. 시간은 사람마다 다른 속도와 다른 빛깔로 흐른다. 동시에 시간은 하나의 보편적 흐름으로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담고 흐른다.

하늘을 향한 예배는 이 땅의 아름다운 슬픔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닐까? 신비적인 예배음악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담은 대부의 주제가들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카치니의 아베마리아가 러시아의 젊은 여성 성악가의 목소리를 따라 조용한 선율로 마음을 적신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던 지난 5-6년의 기간 중에 적어도 2년 동안 밤의 잠자리에서 늘 듣곤 했던 곡이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처음 들은 것은 채플에서였다. 이대 채플에서 300백 명의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부르는 아베마리아가 몹시 감동적이었다. 구노와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만 알고 있었는데,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라니. 알고 보니 이 노래는 20세기 러시아 음악가 바빌로프의 작품이라고 한다. 자기 이름을 감추고 르네상스 시대 작곡가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발표해서 지금까지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로 불리고 있다.

한 가닥 하얀 명주실처럼 겸허하게 뿜어 나오는 순수한 음성이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허공에 제단을 만든다. 제단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마리아에게 아뢴다.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는 중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남성 이미지이므로 여신의 역할이 필요했다는 주장도 있고, 중세의 그리스도가 너무 높아져서 가까이 모시고 하소연할 상대를 찾아 마리아 숭배가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얼마나 할 말이 많을까. 누군가는 그 말들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성모 마리아가 한 셈이다. 무슨 말을 하든 선입견 없이 차별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어주는 역할을 성모 마리아에게 맡긴 셈이다. 내 말을 들어주는 성모 마리아여, 그대를 경외하고 찬양합니다. 아베마리아는 그런 민중의 심정과 신앙을 담고 있는 것 같다.

20년 전 쯤에 경주에 혼자 가서 며칠 머문 적이 있는데, 석가탑에 한참 앉아 있었다. 석가탑의 원명은 석가모니상주설법탑(釋迦牟尼常住說法塔)이다. 석가모니가 거기에 머무르며 설법하는 것을 형상화한 탑이라는 의미이다. 그 탑을 찾아와 갖은 사연을 아뢰며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돌멩이들이 층층이 쌓여 아무런 소리도 없는 그 탑은 거길 찾아와 소원을 비는 수많은 중생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일일이 말씀을 전하는 석가모니를 나타낸 것이라는 얘기이다. 서양에 아베마리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석가탑이 있는 셈이다.

아베마리아를 들으면 평화로 안내된다. 그 평화는 아무런 일도 없어서 생기는 평화라기 보다는 상처 받기 쉬운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만드는 평화이다. 삶의 고통과 슬픔과 혼돈을 마음에 안고 와서 마리아 상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 누가 감히 그들을 해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인생에 대한 연민과 비폭력으로 안내한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

러시아의 장엄한 예배음악과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대부의 주제곡과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사람이 얼마나 영적인 존재인지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