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시간을 잊고 천천히 산책하는데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이 고맙다.
어제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학생들과 읽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프랑스 대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만큼이나 중요한 문서라고 나는 평가한다. 근대를 연 프랑스 혁명과 영국 혁명의 정신적 기원이 종교개혁에 있다는 것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말하자면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내세운 근대의 시작점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어제 읽으면서 몇 가지 새롭게 깨달은 점. 1. 루터에게 설교란 자유를 전하는 일이다. 즉 교회는 설교를 통해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2. 루터에게 ‘의롭게 여김 받음’과 ‘자유’ 그리고 ‘구원’은 같은 말이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총으로 ‘의롭게 여김 받음’으로 자유로워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기와 화해하는 일이다. 4. 의롭게 여김받음은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화해인데, 그것은 곧 자기와의 화해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다. 사람은 흔히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숭배에 빠져 있으며, 자기 숭배는 타자 숭배에서 비롯된다. 5. 자기와의 화해는 타자와의 화해로 이어진다. 자유가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6. 율법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루터는 말하면서 그가 든 예는 십계명 중의 마지막 계명이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르네 지라르가 십계명의 핵심이라고 보는 계명이다. 탐심이란 물질을 많이 갖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남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사람의 욕망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고 남에게서 비롯되니 누구도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가 탐심을 인간의 원죄로 말할 때에, 그들도 지라르처럼 십계명을 모방욕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사진: 북한산 및 한뫼유거의 산책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