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늘 께어 있으라고 했다. 늘 깨어 있다는 것은 순간을 사는 걸 가리킨다. 현상학적 시간의 출발은 여기에 있다. 순간으로 쪼개면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는 없다. 이야기는 시간의 길이를 필요로 하는데 순간은 길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 안에서 벌어진 갈등과 절망과 무기력의 자취를 잊고, 또 과거의 연장에서 성취를 꿈꾸는 미래를 버리고 영원한 현재인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순간의 시간이다. 흘러가는 세월을 넘어 수직적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야곱이 베델에서 천사가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보았듯이. 순간으로 들어가 모든 아상과 기존관념을 버리고 무에서 자기를 새로이 찾는다.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가 순간을 강조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순간을 순간이라 하지 않고 현재라고 하면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이 된다. 현재는 주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신의 부름을 듣는 자기(Self: I가 아님)를 말하고 하이데거는 존재(Sein)의 부름을 듣는 현존재(Dasein)를 말했기 때문에 주체를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구원과 자유의 시간을 현재라 하지 않고 순간이라 했다.
순간은 무의 시간이요 유채색이 아니라 무채색이다. 어쩌면 조선 유학자들이 수묵화를 그린 것도 순간의 시간을 추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유학자들 역시 늘 깨어 있음(常惺惺)을 강조했다. 유학은 도학으로서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에는 압축된 시간이 녹아들어가 있지 않은가. 시간 안에서 생긴 삶의 이야기가 순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띤다. 다시 말해서 흐르는 시간 안에서 순간을 타는 것이며, 흐르는 시간 없이 순간을 말할 수 없다. 순간의 자유는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상학적 시간의 태두이면서도 흐르는 세월의 시간을 신의 피조물로 말한 건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폴 리쾨르의 말이 맞다. 순수한 현상학적 시간은 없다. 물론 순간과 현상학적 현재의 시간을 철저하게 경험하지 않으면 흐르는 시간은 새로움 없이 과거의 연장이다. 그래서 순간을 강조하고 현상학적 시간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배제하면 새로운 자기 정립도 없고 역사도 없다.
사진: 스트라스부르 유학시절(1980년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