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예수회 신부는 오늘날 예배에 워십(worship)이 약화된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미사의 핵심이 worship에서 communion으로 이동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사제가 대중과 함께 전면의 감실(성체를 모신 조그만 방)을 향해 미사를 집전했는데,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사제는 성도를 마주보며 집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이 염려하는 건 요즘 미사에 강론이 너무 길어졌고 무대에 젊은이들의 음악을 올리는 일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걸 가리켜 그는 쇼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건한 워십이 사라졌다고 그는 주장했다.

내가 볼 때에 그건 절대와 상대의 문제이다. 사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말씀 중심으로 바꾸면서 소통이 중요해졌고, 교회 안에 설교단을 교인들 가까이 세웠다. 이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특징을 잘 살린 것이요 기독교의 본질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절대 초월자이지만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상대하신 분이다. 기독교 신론의 핵심은 성자에 있으므로 말씀을 강조하고 상대를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중심이 되면서 인간은 해석학적 주체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해주시고 사제와 신도가 말씀을 중심으로 상대하는 일은 서양에서 권위주의가 물러가고 민주주의가 서는 기반이 되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communion 중심으로 바뀐 것도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잘 살린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상대만 강조되면서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기독론 중심의 대화의 신학이 성부 중심의 경배의 신학을 약화시켰다. 그렇게 보면 어제 같이 얘기를 나눈 신부의 염려는 일리가 있다. 나도 그런 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성부가 절대이고 성자가 상대라면 성령은 절대와 상대의 변증법적 통일의 영이다. 헤겔 철학에서 성령이 인간 정신으로 바뀐 이래로 인간은 경외심을 잃고 가치 상대주의에 빠졌다.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절대를 회복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우리나라 교회는 아직 상대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해야할 단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을 상대해 주시는 데서 찾지 않으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고 기독교를 권위주의적 종교로 만든다.

사진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쌩 뽈(Saint Paul) 교회(2006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