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원 졸업생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참된 종교>를 읽고 있다. 오늘은 5장 이후의 서론부분. 11장에 가서야 본론이 시작되는 것 같다. 악의 문제, 존재 계층, 내면성의 원리 등 이후 기독교 신학에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와 사유방식이 들어 있는 초기 작품이다.
서론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교와 이단과 분파에 대한 평가가 따른다. 오늘 읽은 인상적인 귀절. “말마디 몇이나 문장 몇 개만 바꾸면 자기네가 그대로 그리스도교가 됨을 알게 될 것” 이만큼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기독교 신앙과 가깝게 느낀다. “인간 구원의 중추가 되는 가르침이 하나 있으니, 철학 곧 지혜에 대한 탐구(sapientiae studium)와 종교(religio)가 다르지 않다고 우리는 믿고 가르친다.” “종교적 거룩함 안에서 철학적이 되지(in sacris philosophantur) 못하는 자나 철학 안에서 종교적으로 거룩해지지(in philosophia consecurantur) 못하는 자”를 아우구스티누는 비판한다.
이처럼 초기 작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을 기독교 신앙에 가깝게 느끼는 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이 미신을 떨치고 내면의 성숙을 이루는 데 공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도 분명하게 보인다.
철학은 지혜(소피아)에 대한 사랑(필리아)이다. 지혜는 자기와 모두를 이롭게 하는 길을 아는 것이며, 진리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점에서 진리는 최고선이라고도 부른다. 플라톤은 최고선이라 했고 퇴계 선생은 순선이라고 했다. 선은 좋다는 뜻이니 단순히 도덕적 선을 가리키지 않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좋은 것을 가리킨다.
철학은 지혜를 구하지만 신학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몫이다. 최고선도 하나님이다. 칸트는 최상선(도덕적 자기완성. 실천이성의 영역)과 최고선을 구분했는데, 최고선은 신의 영역으로 보았다. 그래서 당시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여하튼 그리스도인은 지혜를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어 선악을 아는 지식 곧 지혜를 소유하려고 한 것이 죄이다.
철학과 신학의 차이도 거기에 있다. 철학은 지혜와 진리와 최고선을 소유하려고 하고,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할 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기도 하다. 소유하지 않고 참여할 뿐. 그래서 예수께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겠지.
사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던 밀라노 시 번화가의 푸른 하늘 밑에 서 있는 십자가상(199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