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때부터 한글에 관심이 많았다. 한글은 우리의 일상어이며,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말이다. 한글을 물려받아 모국어로 삼고 있는 우리는 우주와 삶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한글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깨달음을 말하고자 할 때에 우리에게는 역시 한글이 가장 알맞다. 한글에는 이 땅의 냄새가 배어 있고 이 땅에서 수만년 살았던 사람들의 땀냄새가 배어 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배운 외국어들을 유창하게 만드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민족주의에 갇힐 필요는 없다. 나는 한글 전용주의자는 아니다. 이미 상당한 양의 한자말이 우리말의 일부가 되어 있는데 한글만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이 땅의 언어를 잘 살려 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언어가 아닌 한글로만 잘 드러낼 수 있는 생각들이 있고 느낌들이 있다. 그 점에서 한글을 잘 살려 쓰는 것이 세계 문화에도 공헌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청년시절부터 나는 학문의 언어도 일상언어인 한글을 살려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한자말을사용하는 것이야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구태여 새로 한자말을 만들어 사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쉬운 말을 써야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고 그래야 학문도 발전한다. 학문이란 인간의 삶의 경험을 소재로 진리를 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의 경험을 잘 살릴 수 있는 한글을 잘 살려 쓸 때에 학문도 우리 사상이 되고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 된다. 사상 자체야 어려울 수 있지만 사상을 표현하는 말이 어려워서야 어떻게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독일어는 한자처럼 낱말을 붙여 새 낱말을 만드는 조어가 가능한데 프랑스어는 한글처럼 그게 안 된다. 그래서 독일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 사유를 하는데 유리하고 프랑스어는 문학 언어로서 뛰어나다. 프랑스 철학도 관념적이기 보다는 생의 철학 쪽이 더 강하다.

프랑스 유학 시절에 프랑스인들은 독일어를 어떻게 번역하는지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다.박사논문을 쓰면서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책을 읽었다. 거기에 보면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말로 존재초월(Seinstranzendenz) 이란 말이 나온다. 칼 만하임이 유토피아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일상어인 Sein과 Tranzendenz 합해 새로운 말을 만들었는데, 한자말로 ‘존재’와 ‘초월’이란 말을 합해 존재초월이라고 번역하면 독일어 조어와 거의 같은 뜻이 된다. 그러나 한자말을 많이 쓰는 우리에게도 존재초월이란 말의 의미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렇게 학문언어가 일반인에게는 낯선 언어가 된다.

프랑스어 번역판을 보았다. Seinstranzendenz를 프랑스어로 어떻게 번역했는지 대조해 보았다. Transcendence à l’être 라고 표기했다가 이내 dépasser ce qui est 로 풀어서 표기했다. 전자는 독일어의 조어 형태를 그대로 살리려고 애쓴 말인데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아니다. 말하자면 독일식 표현인 셈이다. 후자는 독일어를 프랑스 일상언어로 풀어 쓴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벗어남’ 또는 ‘현상태를 넘어섬’이란 뜻이다. 프랑스 번역판은 주로 후자의 용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식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추상적 학문용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쉬운 모국어를 살리려고 하는 모습이 뚜렷하다. 프랑스어를 보호하려는 프랑스인들의 노력을 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쉬운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허위가 없는 진실한 태도가 아닐까. 그런데 진실하기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사진은 초가을 빗방울 떨어지는 호수의 풍경 2021.10.8.